기획 완결 박희의 한국사 명장열전

목숨 걸고 절개와 정도를 지키니 모든 이가 감복

입력 2016. 12. 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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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끝> 강직한 맹장 박동선


 

 

 

국가 안위와 백성을 먼저 살펴

 

박동선(朴東善·1562∼1640)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다.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이며 어머니는 사옹원 참봉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1590년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검열(檢閱)에 제수되고 광해군이 세자로서 분조(分朝·전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이끌 때 수행하고 사서(司書)에 올랐다. 여러 벼슬을 역임한 후 병조좌랑이 됐다.

1596년에 홍산(鴻山·충청도 부여)의 난적(亂賊) 이몽학(李夢鶴)이 여러 고을을 겁탈하고 그 수령(守令)을 포박하고서 홍주(洪州·홍성)로 쳐들어왔다. 그는 수사(水使) 최호(崔湖)에게 함께 토벌하기를 요청했다. 최호가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다가 박동선이 의리로 책망하니 그제야 따랐다.

드디어 이웃 고을의 군사를 징발해 함께 홍주로 가서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과 군사를 합해 성(城)에 올랐다. 적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들어오지 못하고 드디어 궤란(潰亂·싸움에 패해 흩어져 도망침) 하더니 부하가 이몽학을 베고 항복했다. 이 난을 평정한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그는 포훈 대상에서 제외됐으나 조금도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왜구들의 침입이 난폭했는데 그가 또 수사(水使)에게 고을 동쪽 옥마봉(玉馬峯)에서 차단하기를 요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적이 고을에 들어오니 그는 비로소 주민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 배에 다 태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타던 말을 버리고 대신 사람을 건너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이 일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고을 수령으로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성실하게 백성들을 다스리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썼다. 박동선을 각별히 인정한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그를 대사간에 임명했다. 1613년 부왕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했다.

“옳다”는 주장은 끝까지 관철시켜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 1626년 대사헌에 임명했다. 이때 과거가 있었는데 고관(考官·고시관)의 자제가 많이 과방(科榜·합격자)에 들었다. 분개한 박동선은 논계(論啓·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따져 아뢰는 것)를 통해 그 과방을 파기했다. 즉 상피(相避·공적인 공간에서 일정한 범위 내의 친인척이 자리를 같이하지 않도록 규제하는 제도)와 피혐(避嫌·논란 중인 사건에 연루된 이는 혐의가 다 풀릴 때까지 관직을 떠나는 것)을 어긴 것이니 이 과거는 무효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한 강직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이 강화로 거동할 예정이어서 그는 가족과 작별하고 왕을 따르려 했다. 왕은 늙고 병든 신하들에게 명해 먼저 가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먼저 떠나 강화로 갔다. 그러나 적병이 갑자기 닥쳤기에 왕은 강화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강화가 함락되자 그는 왕손(王孫)을 모시고 교동(喬桐)으로 갔다가 호서(湖西)로 내려갔다. 1640년 79세가 됐는데 그의 병이 위독해 심신이 극히 쇠약해졌으나 약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왕을 잘 보필하지 못한 죄인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자신의 생사관(生死觀)이 이유였다. 가족에게 말하기를, “이제 부모가 끼친 몸을 보전해 돌아가니, 여한이 없다” 하며 조용히 서거했다. 이것이 그의 고결한 생애의 시종(始終)이었다.


젊어서부터 겸양하고 말은 아껴

젊어서부터 조정에 나가면 조용하고 겸양해 경쟁하지 않고 조심스러워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대절(大節·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는 절개)에 임하거나 대사(大事)를 당하면 의리를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것이 위엄이 있고 씩씩해 꺾을 수 없는 것이 있었기에 모든 사람이 그 용기에 감복했다.

정말 이 시대에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연재를 마치며>

지난 1년간 필자의 한국사 명장열전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될 수 있으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장들을 소개해 달라는 국방일보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명장들을 발굴·소개하게 된 것은 필자의 고생이면서도 큰 보람이었습니다. 다만 독자들로부터 “이분은 문관인데 왜 명장이냐?”라는 질문에 아주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처럼 군사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양성하는 시대가 아닌 조선 시대에는 무과 출신이 국가의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드물거나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는 국방을 책임지는 고위직도 문과 출신이 독점하던 시대이다 보니 문신들이 명장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질정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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