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박희의 한국사 명장열전

안향의 후손…22세 때 임진왜란 나자 왜군 토벌 앞장

입력 2016. 12. 21   16:11
0 댓글

<47> 평생 충효로 점철된 안몽윤


 

 

안몽윤(安夢尹·1571~1650)은 본관이 순흥(順興)이고 자는 상경(商卿)이다. 음보(蔭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이나 음덕에 의해 특별한 대우를 받아 관직을 얻거나 벼슬에 보임되는 것)로 무관이 됐고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적 돕던 부적자 포박 공로 선조가 포상


가문이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국가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했다. 아버지는 직장(直長)을 지낸 세복(世復)이고 어머니는 광주김씨로 이조참판 김구(金絿)의 손녀요 진사시에 장원한 김균(金鈞)의 딸이다.

안몽윤은 선이 굵었고 일생을 충효의 바탕 위에 살아간 인물이다. 그는 2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발해 출전했다. 이때 왜군을 토벌하는 한편, 부적행위(附敵行爲: 적의 편에 붙어 적을 돕는 행위)를 하며 구날(構捏: 억측으로 일을 꾸밈)을 일삼던 왜역관(일어 통역관) 김덕회(金德澮)·김응관(金應灌)을 포박해 행조(行朝: 왕이 피난 가 있는 곳)에 바쳤다. 선조는 가상하게 여겨 술과 옷을 하사했다.

전주(全州)의 분조(分朝: 세자가 나가 있는 곳)에서 시행한 무과(武科)에 급제해 1598년에 선전관에 임명됐다. 그 후 능력을 인정받아 경상도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승진했다.

당시 그곳 주사(舟師: 수군)의 변방 지킴이 육군과 균등하지 못해 군졸이 모두 괴로워했는데, 안몽윤이 농사철에는 군사 동원을 줄이고 복무 단축도 조정에 청하는 등 수졸(水卒: 수군 병졸)들을 각별하게 배려했다.

1625년 숙천부사 시절 중국으로 가던 사신 일행이 장맛비로 여러 날 머무르게 됐을 때 그가 빈사(사행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가 됐다. 어느 날 대접할 희견(소·양·돼지)이 떨어지자 참관(站官: 역참의 관리)이 도망쳤다. 그가 홀로 맡아 잘 마무리하자 사신들은 떠나면서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쌀을 내어놓고 사례했다.

1629년에 김해부사에 임명돼 사조(辭朝: 임금에게 하직함)하는 날, 임금은 술과 약물을 하사했다. 이후로 그가 지방으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는 번번이 술과 약물의 내림이 있었으니 임금의 배려는 특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그는 명을 받아 물길로 강화로 출정했다. 안산(安山)에 정박했을 때 적에게 포위돼 고통을 받는 가까운 섬의 주민들을 배를 보내 다른 섬으로 옮겼으며 이로써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많았다 한다. 이처럼 안몽윤은 작전 중에도 민간의 안위를 최고로 걱정하며 그들의 삶을 보살폈다.

외조모 시신 업고가 장사 지내기도


그는 1648년에 포도대장, 이듬해는 지중추부사가 됐다. 그해 5월 인조임금이 승하하자 그는 자신도 병약한데 소식(素食: 고기나 생선을 갖추지 않은 음식, 즉 채식 위주의 소박한 음식)을 하며 지냈다. 이로 인해 병이 더욱 깊어지자 친구가 고기를 권했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자손들이 다시 권하자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1650년 봄에 나이 80세로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그해 가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어려서도 뜻과 기상이 남달라 비록 여러 날을 먹지 않더라도 배고픔을 숨겼으며 어버이를 효로 섬기되 반드시 예에 따랐다. 임진왜란 병난을 피할 때 어머니가 말 타는 것에 익숙지 않자 말의 고삐를 잡고 가느라 발이 부르트기도 했다. 외조모(外祖母)의 상고(喪故)가 있자 모친을 위로하려고 직접 외조모의 시신을 업고와 파주(坡州)의 고향 산에 장사 지냈다.

부모의 제삿날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했으며, 날씨가 춥다고 폐하는 일이 없었고 늙었다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우애도 매우 지극했다. 일찍이 병란 중에 큰형과 형수·누이가 도중에 길을 잃었는데 어두운 밤에 그가 가서 찾으려 하자 부모가 말렸으나 기어코 가서 모두 찾아 같이 돌아왔다.

형님 상을 당해서는 고기를 먹지 않고 1년을 마쳤으며, 아우와 누이가 병을 앓자 업어다 구호하고 약을 써 낫게 했다. 친척들과 화목해 일찍이 홀로 된 고모를 모셔다가 정성껏 봉양했다. 고모는 보답할 것이 없어 종을 내주었으나 굳이 사양했다.

가난한 자는 혼인할 수 있게 도와

 

일가 사람으로서 가난해 혼인을 치를 수 없는 자는 모두 도와주었다. 집안 사람 중에 황씨(黃氏) 성을 가진 사람이 어려서 고아가 돼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그는 가엾게 여겨 거두어 길렀고 자라서는 혼인을 시켰다.

남의 곤궁을 도와 때로는 말을 팔아 구조했고, 분곡(奔哭: 부모의 상을 맞아 달려감)하는 사람을 보면 부조를 후하게 주어 도왔다. 본래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지위가 높아지면 그 집에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몽윤의 전 생애는 후세에 큰 사표(師表)가 됐으니 지금처럼 인심이 각박한 세태에 그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