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을 그린 화가들

“전쟁의 영웅은 없다…깨어날 수 없는 악몽뿐”

입력 2016. 12. 1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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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앙리 루소 ‘전쟁’


지천명 나이 앞두고 화가에 도전

당시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으나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펼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가들은 특정 유파에 속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동안 연재에 등장한 많은 화가들도 저마다 화풍에 맞는 유파 소속이었죠. 하지만 오늘은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를 소개하겠습니다. 이국적인 정글 풍경을 주로 그린 루소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루소는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고 미술을 직업으로 하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도 다소 늦게 시작했죠. 그럼에도 루소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루소의 작품을 사 모은 피카소는 1908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당시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그에 대한 찬사를 바쳤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가 천재였던 걸까요? 우선 그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죠.



세관원으로 일하다 49세에 전업화가로

양철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중등교육도 겨우 마쳤습니다. 물론 화가가 되기 위한 정규 수업도 받지 못했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20살이 되던 1863년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한 루소는 51보병연대 음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전역을 하고 이듬해 결혼해 파리시의 세관원으로 일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화가의 삶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루소가 어떻게 ‘전위예술가들의 아버지’가 됐을까요? 세관원으로 일할 때 루소의 일은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이었죠.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리는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는 시간으로 활용했죠. 그렇게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84년 미술관과 박물관에 들어가 그림을 모사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받게 됩니다. 다음해인 1885년 41세의 나이로 작업실을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9세인 1893년 드디어 전업화가가 되기 위해 22년간 일했던 세관에서 은퇴하죠. 보통 대학을 졸업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과 달리 그는 하늘의 섭리를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바로 앞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램프가 있는 화가의 초상, 1902, 캔버스에 유채, 230x190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소장

진정한 아방가르드 작가

루소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지, 왜 진정한 아방가르드 작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루소가 작품생활을 하던 때는 말 그대로 ‘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시대’였죠. 그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화풍과 거리가 멉니다. 그는 유럽에서는 본 적도 없는 정글을 그리는 데 평생을 바쳤죠. 그렇다면 여기서 또 궁금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글을 그린 화가가 전쟁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루소는 1894년 전업화가의 삶을 시작하면서 주제로 역사화에서나 다뤄지던 전쟁을 채택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림을 살펴보죠. 헐벗은 군상의 무리가 작품 하단에 깔려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시체 위를 맴도는 까마귀들과 그 위에 떠 있는 까만 말과 여인, 파란 하늘의 붉은 구름 등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죠. 작가는 이 작품의 부제를 캔버스 뒷면에 남겨두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포와 절망과 눈물과 폐허를 남겨놓을 뿐’이라고요.

루소의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외면받았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화풍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아카데미풍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이야 신선하고 새로운 예술을 ‘아방가르드 정신’이라며 긍정적으로 보고 반기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항상 비판을 받았습니다. 루소는 이런 비판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갔죠. 그리고 ‘전쟁’에 이르러서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바로 작가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 같은 사람을 통해서죠. 자리는 ‘아카데미 교육이나 예술의 규칙을 보이는 대로 때려 부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독창성과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그는 루소의 ‘전쟁’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자리는 이 작품을 너무 인상 깊게 본 나머지 동판화로 다시 제작, 그의 잡지인 ‘리마지에’에 싣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전쟁의 진면목을 그려내다

“화가도 하나의 인격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모르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고 해서 꼭 조롱할 필요는 없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계수화하고 계량화한다. 인간과 사물에 숫자를 달고 분류하고 명칭을 붙인 다음 작은 상자에 넣어서 정리한다. 창조물이든 뭐든 정한 규칙대로 눌러서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규칙에서 벗어나는 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는 안절부절하거나 당황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하기 마련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몽땅 미친 짓, 바보짓이라고 해두면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의 어리석은 편견의 제물이 됐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독학으로 일궜고 드물게 빛나는 업적을 성취했다. 그의 예술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물론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큰 발걸음을 내디딘 건 분명하다. 루소의 그림은 전쟁의 두려움에 대해서 발언한다. 전쟁이 휩쓴 뒤의 평화는 이처럼 기약하기 힘들다. 숨 쉬는 것은 모두 지상에 누웠다. 전쟁의 광기를 표현할 줄 아는 예술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건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다. 지울 수 없는 슬픔이다. 루소의 전쟁에는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진면목을 그려낸 루소는 진정한 예술가다.”

자리의 평가는 당시 화단이나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그리고 루소의 ‘전쟁’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루소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에 루소가 살았다면 어땠을까? 연일 매스컴에서는 안정적이란 이유로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열을 올린다고 전합니다. 이제는 안정된 삶에 익숙해져 변화하는 것이 두려운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가는 중년 화가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는 과연 괴짜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길을 찾은 용기 있는 자일까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에 루소를 용기 있는 인간으로 보는 젊은이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주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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