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북유럽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발트해 물귀신’ 핀란드 잠수함, 소련 해군 ‘꽁꽁’ 묶다

입력 2016. 12. 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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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핀란드 ③


4000여 명의 해군만으로3

4만 명의 소련 발트함대 격퇴

300대 항공기로 적기 1800대 격추

‘단결’한 다윗이 골리앗 물리친 격

‘겨울·여름전쟁’ 승리 자부심 대단

 

 

수오멘린나 요새 해변의 잠수함박물관.이 ‘베시코’함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5척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잠수함이다.

 

 

 

1939년 10월, 소련의 스탈린은 “핀란드 국경이 레닌그라드에 가까우니 완충지대를 위해 당신들의 영토를 내놓으라”고 했다. 외교적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강대국의 협박을 핀란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1939년 ‘겨울전쟁’, 1941년 ‘여름전쟁’을 통해 끝까지 자신들의 주권을 지켜냈다.

포르보 민속마을.


핀란드 전통 마을 ‘포르보’를 찾아서

헬싱키 항에서 ‘포르보(Porvoo)’행 소형 선박을 탔다. 헬싱키에서 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이곳은 1346년에 건립된 작은 도시다. 포르보는 ‘강의 요새’라는 의미가 있지만, 반복되는 전쟁으로 도시는 수차례 불탔다.

민속마을 포르보 거리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주민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옛날 군복과 소총으로 과거 군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그들은 핀란드 전쟁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선조들이 이룬 ‘겨울·여름전쟁’의 빛나는 승리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는 어렴풋이 그 전쟁을 기억하는 분도 계셨다.

잠수함박물관 내부 승조원 생활공간.

다시 시작된 핀란드-소련 간의 ‘여름전쟁’

1940년 3월 12일, 핀란드·소련 간의 ‘겨울전쟁’은 끝났다. 소련은 약간의 영토적 이익은 얻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감수해야 했다. 소련 점령지의 핀란드인들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대부분 핀란드로 이주했고, 스탈린이 해방시킨 것은 ‘곰’과 ‘순록’뿐이었다. 형편없는 적군(赤軍)의 실상을 본 히틀러는 바로 다음 해에 소련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1941년 6월 22일, 북극해에서 흑해까지 3000㎞의 전선에서 독일군·루마니아군·헝가리군 등 300만 대군이 소련으로 밀고 들어갔다.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는 은밀하게 독일로부터 엄청난 군사 장비를 지원받았다. 6월 25일 핀란드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두 번째 ‘여름전쟁’에 돌입했다.

사기충천한 핀란드군은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과 30㎞ 떨어진 지점까지 점령했다. 다급해진 소련은 이제 거꾸로 핀란드에 과거 점령한 영토를 다 반환하겠다며 정전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6일, 드디어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음을 선언했고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러시아 기병장교 시절의 만네르하임.


공군군사박물관 내부. 이 박물관에는 70여 대의 다양한 항공기가 전시돼 있다.

 

알려지지 않은 핀란드 해·공군의 혈투

1930년대 핀란드 인구는 370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부는 국가적 관심을 가지고 해·공군력 강화에 예산을 집중 투자했다. 핀란드 해군의 역사는 헬싱키 ‘수오멘린나’ 요새 해변의 잠수함박물관에 사진과 책자로 잘 전시돼 있다.

1939년 핀란드 해군은 4000여 명의 병력과 구축함 2척, 포함 2척, 잠수함 5척, 어뢰정 7척을 보유했다. 이에 비해 소련 발트함대는 34만의 해군병력과 전함 2척을 포함한 대형함정 23척, 잠수함 52척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 같은 전력 차이였다.

1939년 12월, 소련은 핀란드 연안 봉쇄를 선언하고 2만6000톤급 ‘10월혁명’함을 출격시켰지만, 필사적인 핀란드군 해안포병의 저항으로 물러섰다. 더구나 ‘발트해의 물귀신’ 핀란드 잠수함의 활동으로 소련 해군은 핀란드의 눈치를 보면서 대서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병력 숫자로 소련군 대비 1%에 불과한 핀란드 해군이 악착스럽게 발트함대를 물고 늘어져 수도 헬싱키를 지켜낸 것이다.

헬싱키 근교 란드보(Landbo) 시에는 87년 전통을 자랑하는 공군군사박물관이 있다. 1929년 5월 4일, 핀란드 육군항공대는 공군으로 독립했다. 1930년대 전운이 감돌자 핀란드는 네덜란드산 요격전투기(Foker D21) 42대를 구매하기 시작해 전쟁 중에는 최대 300대의 항공기를 확보했다. 이런 전력으로 2000대가 넘는 소련 공군기를 대적해 무려 1800여 대를 격추했다. 박물관 내부에는 전쟁 당시 핀란드 공군 항공기들과 지상요원들의 활동 사진들이 꽉 차 있었다.



핀란드 구국의 영웅 ‘만네르하임’ 기념관

어느 국가나 전쟁에서 거둔 빛나는 승리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전쟁지도자가 있다. 헬싱키의 남북 종단대로는 ‘만네르하임 원수 거리’로 불린다. 만네르하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탁월한 외교력과 군사전략으로 핀란드를 소련침공으로부터 구했다.

헬싱키 시내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만네르하임’ 생가! 오늘날 기념관으로 개조된 그의 생가에는 매일 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1867년, ‘만네르하임’이 출생할 때 핀란드는 러시아공국이었다. 어려서부터 조국 독립을 꿈꿨던 그는 자연스럽게 핀란드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다. 육사 졸업 후 러시아 기병학교를 거쳐 훗날 장군으로 진급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독립한 핀란드로 귀국해 군 건설에 참여했다. 이런 군사적 경력과 뜨거운 애국심이 그를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조국을 구하는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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