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용장 최진립
25세 임진왜란 크게 전공 세워
서생포에 침입한 왜군 무찔러
병자호란 때 전사…병조판서 추증
최진립(崔震立·1568~1636)의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다.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최득정(崔得汀)의 증손으로, 조부는 순릉참봉 최삼빙(崔三聘)이고, 아버지는 최신보(崔臣輔)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 황사종(黃士鐘)의 딸이다. 겨우 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0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시 그는 어렸으나 장례와 제사 지내기를 성인보다 더 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그의 나이 25세였는데, 분연히 일어나 부윤 윤인함(尹仁涵)에게 “왜적은 큰 돼지나 큰 뱀처럼 욕심이 많아 영남의 여러 고을을 잠식하였어도 그 칼날을 당할 자가 없으며 지금 우리 고을에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촌으로 가면 곧 언양(彦陽)으로 달리는 길입니다. 길 왼쪽에 저의 선조들의 집이 있는데 왜적이 그곳에 모여 있으며 때로 노략질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비록 미욱하고 겁은 있으나 마을 청년들과 적을 무너뜨리겠습니다”라 하니 윤인함이 장하게 허락했다.
마침내 많은 화구(火具)를 갖고 곧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가 밤을 틈타 적을 섬멸하니 죽은 자가 수백이었다. 노획한 병기들을 모두 거둬 고을로 가져가니 윤인함이 크게 감탄했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가슴을 펴고 나와 그를 따라 적을 무찌르기를 원하니 무리가 거의 수천이었다.
또한 의병장 김호(金虎)와 언양 경내에 매복했다가 측면에서 공격해 적을 크게 격파했다. 계연(鷄淵)에서 싸우다 김호가 적의 탄환을 맞고 죽자 그는 더욱 병사를 단속해 적을 다시 크게 격파했다. 이때 그는 언양의 요해처(要害處·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를 점령하고 적을 막았기에 적의 기세는 크게 위축됐다. 부하들이 적의 목을 바치자 그는 자신의 전공을 전사자와 사졸들에게 돌리니 모든 사람이 더욱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1597년 왜장이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 보루(堡壘)를 쌓고 왜군을 풀어 사방으로 약탈하니 주위 10여 고을이 모두 그 피해를 보았으나 병권(兵權)을 장악한 장수는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다. 부윤이 최진립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서생포를 공격하게 했다. 그는 굴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혼자 나아가 적을 유인했다. 적이 굴 가까이 오자 활을 가득 당겨 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공도 배꼽 밑에 탄환을 맞았으나 기운은 양양하기 평소와 같았다.
1614년 경원부사에 임명되면서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경원은 함경도의 변경이다. 백성들은 기질이 사납고 거칠었으나 역시 그의 조정(調整)으로 복종하며 안정됐다. 임기가 차서 떠날 때가 됐다. 평소 최진립과 친한 판관 이윤우(李潤雨)가 그를 시험하려고 이름있는 기생(妓生)을 불러 여러 날 술자리에서 모시게 했으나 최진립은 끝내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윤우가 감탄해 “오늘에야 비로소 큰 남자를 보겠다. 악비(岳飛·중국 송나라 때 명장)가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고 했다. 북병사(北兵使) 김경서(金景瑞)가 공의 복도(復陶·눈비 막는 외투)가 떨어진 것을 보고 새 담비 가죽으로 만들어 주었으나 그는 끝내 받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과 거리가 30리가 안 되는 곳에 좌·우군으로 나누어서 진을 쳤다. 그는 선두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밤에 적이 공격해오자 선군(先軍)이 먼저 무너지고 적의 기세는 비바람과 같았다. 군중에는 사람의 모습조차 없었는데 그만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적들이 쓰러졌다. 화살이 다하자 따르는 자를 돌아보며 “너희들은 굳이 나를 따라 죽을 것은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리 알라”하며 장렬히 항전했다.
적이 물러나자 여러 아들과 최진립을 따르던 부하들이 그의 시신을 찾았다. 몸에 수십 처의 상처를 입었고 화살이 고슴도치 침처럼 박혔으나 얼굴은 산사람과 같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은 한참 동안 애석히 여기다가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또 경상감사에게 명해 관(官)에서 장사를 치러주게 해 그해 12월에 언양현(彦陽縣)의 오지연(烏池淵)의 산에 장사지냈다.
국가의 기틀을 뒤흔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 우국충정으로 국가에 몸을 바친 최진립의 호국충정은 후대에도 빛나고 있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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