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을 그린 화가들

‘자유주의 아이콘’… 화풍까지 바꿔 전쟁의 공포 전하다

입력 2016. 12. 05   16:26
0 댓글

<43> 잭슨 폴록 ‘전쟁’


‘액션 페인팅’의 전성기인 1947년에 ‘전쟁’ 만들어

작품 제목 명시·작은 종이에 그린 것도 상당히 이례적

화염 속에 놓인 인간과 황소… 기존 작품과 달리 구체적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많은 작가들은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며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해왔습니다. 물론 전쟁을 찬양했던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처럼 예외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번에는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려고 해요. 바로 냉전 시절 미국의 ‘무기’ 역할을 했던 작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한 작가가 국가의 무기 역할을 하게 됐을까요?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폴록은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미국에서 가장 미국적인 미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폴록이 청소년기를 보내던 1929년, 미국은 세계에 들이닥친 대공황을 뉴딜정책으로 타개하려 했습니다. 미술 분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은 예술가연합을 만들고 공공미술 제작 등 각종 사업을 추진했죠. 공공근로 사업을 통해 만나게 된 젊은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들이 동경하던 유럽 미술도 화제에 올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 예술가들이 미국에서 마치 제왕과 같은 대접을 받는 현상도 나타났죠. 유럽의 다양한 미술은 당시 사실적인 화풍에 익숙한 미국 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기에 세계대전을 피해 유럽의 유명 작가들이 망명하면서 미국 미술계는 유럽미술의 자양분을 이식받게 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진정한 우리, 진정한 미국의 미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유럽의 다양한 미술과 이를 이끄는 작가들을 수혈받은 미국 미술계의 새로운 화두는 바로 단연 ‘미국적인 미술’이었죠. 그리고 이때 등장한 것이 폴록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입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선배인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사용한 자동기술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동기술법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를 살펴보면서 초현실주의를 설명할 때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작품 제작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입니다. 폴록은 이 방식을 적용한 드리핑(dripping)이라는 표현 방법을 구사했죠. 그의 작품은 캔버스 앞에서 작가가 고심해서 하나하나 형상을 그려나가는 기존의 방법과는 달랐습니다. 폴록은 바닥에 캔버스 천을 깔아놓고 그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그 안에 뛰어들어가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가의 행동에 따라 물감이 떨어지는 위치, 방향 등이 결정지어지는 그의 작품은 행위가 중요하기에 ‘액션 페인팅’이라고도 하죠.

왜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미국적인 것인지 의문이 생길 텐데요. 자유로운 행동의 흔적인 폴록의 작품은 “그야말로 미국의 자유주의를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스토리나 형상도 없는 완전한 추상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에는 큰 관심이 없었죠. 이는 미국과 대척점에 서 있던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의 사실주의적, 체제 유지 선전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또 폴록의 작품은 엄청나게 큰 사이즈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점이 미국의 ‘대륙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했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공공미술 작업을 하며 많이 그렸던 벽화의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그가 멕시코 벽화 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 점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죠. 폴록의 작업 방식도 미국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캔버스 주위를 뛰어다니며 작업하는 폴록의 모습은 “마치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리는 서부의 사나이와 같다”며 미국이 주창하는 개척자 정신의 상징으로 해석되곤 했습니다.


잭슨 폴록의 작업 모습.   출처=잭슨 폴록 공식 홈페이지

 

 

 


추상표현주의의 선두주자

추상표현주의의 선두 주자로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폴록은 이처럼 자유주의·대륙성·개척정신의 아이콘, 그리고 미국 회화의 승리라는 또 다른 의미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로운 미국의 모습을 홍보하는 ‘문화적 냉전’의 대표적인 무기가 됐죠. 폴록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폴록은 이 부분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는 데 열중했을 뿐이죠.



구체적 형상의 ‘전쟁’

이런 폴록도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사실 그가 작품에 제목을 달았다는 행위 자체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폴록은 작품에 메시지를 담는 데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제목도 번호로 매겨진 경우가 많죠. 작품을 제작할 때 아무 계획을 하지 않기 때문에, 또 형상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전쟁’이란 구체적인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전쟁’은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전성기를 맞았던 시절, 그리고 대표작이 나오기 시작한 시절인 1947년에 만들어집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들과는 달리 형상이 구체적입니다. 격렬한 화염 속에 놓인 인간과 황소,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고통받는 인간, 화염 속에서 날카롭게 뻗어져 나오는 직선들은 전쟁의 파괴와 잔혹한 속성을 상징하고 있죠. 폴락은 이 작품을 통해 전쟁에 대한 보편적인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위에 집중했던 폴락이 왜 굳이 전쟁이란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그렸을까요? 그리고 추상에 집중하던 평소와 달리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회화를 남겼을까요? 더 나아가 아예 제목까지 붙였을까요? 아마 그만큼 전쟁은 모든 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만큼 화가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액션 페인팅을 위해 거대한 캔버스를 뛰어다니던 폴록이 작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전쟁이 예술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윤애 문화역서울284 주임연구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