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북유럽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하얀 위장복에 스키 타고 신출귀몰 ‘유령의 군대’

입력 2016. 12. 04   11:57
0 댓글

<9> 핀란드 ②


가혹한 자연환경이 핀란드 국민 단련

사냥 덕에 사격술 능하고 야전 최적화

45만 소련군 속수무책 겨울전쟁 패퇴

 

국경 전적지에 가니 곳곳에 격전 흔적

전쟁기념관엔 역사자료·장비들 빼곡

 

 


 

 

 


1945년, 소련과 핀란드 간의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은 고집 센 이웃 나라 국민을 이렇게 평가했다. “형편없는 군대를 가진 나라는 푸대접을 받지만, 훌륭한 군대를 보유한 국가는 영원한 존경을 받는다. 나는 용감한 핀란드인들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제2차 세계대전 시 소국(小國)이 강대국과 투쟁해 끝까지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세계에서 핀란드가 유일하다.



국경 마을 격전지를 찾아가며 만난 사람들

국경 마을 ‘수오무살미(Suomussalmi)’에 가려면 기차로 7시간 걸리는 ‘카자니(Kajaani)’에 도착한 후,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열차 안에서 핀란드 교사와 이스라엘군 전역 병사를 만났다. 시골 전적지를 찾아간다는 말에 금방 호기심을 나타낸다. 특히 역사교사인 ‘오스카(Oscar)’는 핀란드인들의 영원한 자부심 ‘겨울전쟁’에 대해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교육한다고 했다. 헬싱키에 거주하는 유대인 청년 ‘사우드(Saud)’는 이스라엘에서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이스라엘 육군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는 “사막보병으로 근무하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뜨거운 모래밭에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또한 넉 달 동안의 혹독한 교육과정을 거치는 분대장으로 선발됐다. 결국 병장으로 진급했고, 전역비로 받은 4000유로(약 500만 원)를 지금 여행 경비로 쓰고 있다”라고 했다.


1930년대 썰매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핀란드군.

 

 

 


수십만 소련군의 무덤이 된 겨울전쟁 격전지

오후 늦게 ‘카자니’역에 도착하니 지방도로로 운행하는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 정도 달리니 시골 마을 ‘수오무살미’가 나타났다. 1939년 12월, 바로 이곳에서 소련군 제44·163사단 병력 3만여 명이 혹한과 핀란드군의 포위망에 갇혀 전멸당했다. 그 후 계속된 전투에서 침공군은 수십만의 사상자를 감수해야만 했다. 빈약한 장비와 열세한 병력을 가진 핀란드군의 피해는 적군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작은 촌락 호텔 로비에는 전쟁유물들과 전투상황도가 있었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전쟁기념관은 50㎞ 정도 떨어져 있고 버스도 없다고 한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택시예약을 하려니 교통비가 은근히 부담된다. 그때 옆에 있던 핀란드인 파시(Pasi) 부부가 내일 아침 자기 차에 동승해 국경 전적지로 가자고 했다. 휴가 중인 그들도 마지막으로 전쟁기념관을 보고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고민하던 교통편이 생각지도 않게 해결된 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국경 격전지 내 핀란드군 무명용사 추모 동상.

 

 

 

참전용사 후손의 겨울전쟁 이야기

‘파시’ 부부는 핀란드산 여우 털을 가공해 수출하는 회사를 운영하며 서울도 두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1939년 스키부대 저격병으로 겨울전쟁에 참전했다. 승용차로 30여 분을 달리니 비포장 시골길이 나타났다. 울창한 산림과 호수가 어우러진 국경 지역은 겨울에는 평균 1m 이상의 눈이 쌓인다고 한다. 가혹한 자연환경은 핀란드인들의 자립정신과 지구력을 키웠다. 이들은 스키의 명수였고 일상적인 사냥으로 사격에도 능했다. 더구나 수백 년 만에 얻은 독립을 지키겠다는 애국심은 무서운 전력이 됐다. 참전용사 백부의 겨울전쟁 경험을 ‘파시’는 이렇게 전해 주었다.

“1939년 겨울,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45만 명의 소련군은 방한복도 갖추지 못한 채 핀란드를 침공했다. 폭설이 쏟아지고 혹한이 계속되자 동사자가 속출했다.

백색 위장복에 스키를 타고 신출귀몰하는 핀란드군은 ‘유령의 군대’였다. 저격병의 사격 솜씨 또한 탁월했다. 소련군 기관총 방탄판의 1cm 틈 사이로 총탄을 날려 적군을 명중시켰다. 전투가 끝나면 핀란드군은 통나무 사우나까지 갖춘 야전 땅굴에서 순록 모피를 덮고 잠들었다. 결국, 소련군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공격을 멈춰야 했다.”



‘수오무살미’전투 전사자 추모공원 전경.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핀란드군 장병의 숫자를 의미하는 1만 개의 돌이 깔려 있다.

 

 

 

 

국경 격전지에 교통호·야전숙소 그대로 보존

드디어 핀란드·러시아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높은 망루와 초소 막사에는 군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민간인들이 국경 차단기에 서서 자유롭게 사진촬영을 하기도 했다. 주변 격전지에는 1930년대의 교통호·야전숙소 등이 보존돼 있었고 곳곳에 무명용사 추모 동상도 보였다.

국경에서 다소 떨어진 전쟁기념관에는 1939∼1945년의 각종 역사자료와 장비들이 빼곡하다. 또한 야외전시장에는 노획한 소련군 전차와 대포가 포신을 푹 숙인 채 늘어서 있다. 특히 기념관 옆 ‘수오무살미’전투 추모공원에는 핀란드군 전사자 숫자를 의미하는 1만 개의 큰 돌들이 끝없이 깔려 있었다.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