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박희의 한국사 명장열전

국가 위난 앞장서서 막아낸 ‘군인정신의 표상’

입력 2016. 11. 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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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해전 승전보를 국왕께 보고한 송여종




송여종(宋汝悰·1553~1609)의 자는 언온(彦蘊)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체구가 9척 장신이었는데,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낙안군수 신호의 휘하에서 종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남해에서 승세를 타고 진격해오자 온 나라가 살아날 계책만 도모했다. 이에 송여종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의 휘하에 들어갔다. 신호는 평소 송여종을 큰 그릇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군(郡)의 일을 모두 그에게 위임했다.

신호가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예속돼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적을 토벌할 때 그는 하루도 군중(軍中)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수군(水軍)이 대승하자 이순신이 승전보고를 할 자를 물색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임금은 의주로 피난했고 삼경(三京, 서울·개성·평양)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관수(官守·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왜적에게 번번이 길이 막혀 도중에 돌아왔다.

이순신은 평소 송여종이 순국(殉國)할 마음이 강했음을 듣고 그에게 장계(狀啓·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지방에 나간 벼슬아치가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문서)를 주어 임금에게 올리도록 했다. 송여종이 적진을 전전하며 낮에는 매복(埋伏)하고 밤에만 이동해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멀리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임금이 즉시 인견(引見·임금이 신하를 불러들여 만나봄)해 변경의 일을 친히 묻고 술을 내려 노고를 위로했다.

 

구사일생 임금에게 장계 올려

 


임금이 그 자리에서 이조에 전교하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 송여종은 험한 길을 어렵사리 거쳐 천 리 먼 길을 왔으니 칭찬할 만한 일이다. 남방의 수령 중 궐석 있는 곳을 채울 만하다”고 했다. 이조에서 즉시 의망(擬望·관원을 임명할 때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해 남평(南平)에 임명했다.

그런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녹도(鹿島·전라도 고흥에 있는 섬)의 전 만호(萬戶·지방 무관직)가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으니 대신할 이를 엄격히 선발하여야 합니다. 송여종이 비록 지금 남평에 임명되었긴 하나 일찍이 이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운 적이 있는 등 수전(水戰)에 익숙하므로 이 사람으로 대신하소서” 하자 임금이 윤허해 녹도 만호(鹿島萬戶)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임지에 도착해서는 배를 집으로 삼아 날마다 군실(軍實·병기와 군량)을 점검했다.

 

이순신 휘하에서 수차례 전공 세워


1594년 4월에 조정에서 수군(水軍)에 대해 특별히 무과를 시행해 수군 장수와 병사들을 위무했다.

송여종이 을과(乙科)에 합격하니 당시 나이 42세였다. 1597년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고 원균(元均)이 통제사를 대신했다. 왜적이 그해 7월에 한산도를 함락해 수군이 섬멸됐으나 송여종의 함선은 유독 완전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명(神明)께서 크게 도운 바이다”라며 칭송했다.

 

당시 나이 42세에 을과 합격


이순신이 파직됐다 기용돼 다시 수군을 통제해 남은 배를 수선하기도 전에 적의 함선 200척이 벽파(碧波) 앞바다에 이르렀다. 벽파는 진도(珍島) 앞바다의 벽파리(碧波里)다. 해변에 핀 벽도(碧桃)나무의 꽃을 미화해서 붙인 이름으로 벽파진(碧波津)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함선은 고작 10척뿐이었으나 모두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며 일당백의 기세로 항전했다. 승전보를 왕께 아뢰자 송여종의 공이 크다고 평가됐다.

1598년 7월에 이순신이 송여종에게 명해 좁고 긴 함선 6척을 거느리고 수로를 지키게 하자 그는 즉시 출발해 녹도 앞바다에 은밀히 정박했다. 적선 10척이 바다 안개에 편승해 몰래 이르러 밤을 틈타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염탐해 이를 알아내고 돛대를 올려 앞으로 나아가 남김없이 섬멸하고 난 뒤 개선했다. 이순신이 즉시 그의 공을 기리는 장계를 올렸고, 명나라 장수 또한 상으로 은(銀)과 포(布)를 후하게 내렸다.

11월에 이순신이 수군을 집결시켜 노량(露梁·경남 남해군의 노량과 하동군 금남면의 노량 사이에 있는 나루터)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해 바닷물이 붉게 물들 지경이었다. 나라가 중흥하게 된 전공(戰功)으로는 이곳의 전투가 제일이었는데 송여종의 공(功) 또한 휘하 여러 장수 중에서 당연히 앞섰다. 임진왜란 7년의 전쟁 중 송여종의 전공은 많고도 커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국가의 위난을 앞장서서 막아내고 어떤 험한 고비도 투철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완수해낸 송여종 장군의 행적은 우리 군인정신의 표상이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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