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음악

연합국선 환호로 엇갈린 운명의 노래 독일선 탄식으로

입력 2016. 11. 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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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쟁의 승리와 패배를 노래하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
의 초상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박수·발구름…청중과 함께 소통하는 연주

민족영웅 라데츠키 장군의 무용을 담아

지난 번에 소개한 ‘웰링턴의 승리’나 ‘1812년 서곡’ 같은 정통 클래식에 비해 ‘행진곡’은 우리에게 좀 더 친근하다. 국가 지도자나 귀빈이 참석하는 행사 등 크고 작은 이벤트에 어김없이 깔리는 배경음악이기도 한데 바그너·슈베르트·수자 등 많은 음악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세계의 이름난 오케스트라는 저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 연초 또는 독립기념일 등 국경일에 즈음해 연주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은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빈 필이 매년 신년음악회에서 연주하는 단골 행진곡이 있다. 신나는 리듬과 웅장하면서도 경쾌하고 독특한 지휘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이 작품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유는 청중이 함께 참여해 공연을 유쾌한 기분으로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 곡이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인 것도 한 이유다.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고 파리로 진격한 민족영웅 ‘라데츠키 장군’의 무용을 그린,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ß Ⅰ·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sch)’이 바로 그것이다.



지휘자는 청중을 보며 지휘

요제프 라데츠키(Joseph Radetzky)는 오스트리아 군인으로 이탈리아에 원정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싸웠고, 곧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이 됐다. 1809년 육군 부원수로서 오스트리아의 바그람에서 프랑스와 싸웠으나 패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통제를 받고, 모시던 주군은 폐위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1813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나폴레옹을 상대로 유럽 각국이 대불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동맹군의 사령관으로 라이프치히 전투를 지휘해 대승을 거뒀으며, 그 여세를 몰아 파리 입성에 성공해 나폴레옹의 폐위와 유럽 해방을 이끌었다.

1848년 3월 오스트리아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보수파로 정부 측에 가담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정부군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곡을 만들어 라데츠키 장군에게 헌정했는데 초연 당시 세 번의 앙코르를 받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은 다른 곡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경쾌하고 빠른 템포가 관객과 호흡하기에 적합해 지휘자가 오케스트라가 아닌 청중을 보며 지휘하고, 청중은 리듬에 맞춰 박수로 화답하는 것이다. 시민혁명을 진압하고 개선하는 정부군을 위해 연주를 하자 흥에 겨운 군인들이 ‘군홧발’로 바닥을 구르며 박자를 맞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민간인들이 발구름 대신 ‘박수’로 화답하면서 방식은 바뀌었어도 소통하는 연주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행진곡이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연주 횟수가 많고, 단골 앙코르곡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단순한 음악성이나 대중성을 뛰어넘어 나라를 사랑하고 외세에 항거한 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분수령 중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군의 모습.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獨 항복하던 날, 베를린에 온종일 울려퍼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 항복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남부전역을 담당했던 독일군은 볼가강에 근접해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진 반면, 폐허가 된 시가지의소련군 2개 야전군은 온전한 상태로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2년 8월부터 이듬해까지 6개월 동안 독일군 50만과 소련군 170만의 대군이 사투를 벌였다.

 

베토벤.

 


시가전으로 침략군에게 심대한 피해를 준 소련군은 겨울이 다가오자 월동준비와 보급에 애를 먹는 독일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의도는 적중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자, 독일군에서는 그나마 남은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선 후퇴가 최선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고립된 독일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탈출 계획을 고심할 무렵, 히틀러는 결사항전을 지시했다. 그는 집단군 사령관을 만슈타인으로 교체하고 현 위치 고수를 명령했다.

전략의 귀재 만슈타인도 바닥난 식량·탄약에다 추위에 떠는 독일군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일군은 후퇴가 거부된 채 두 달 반의 기나긴 전투를 이어갔다. 1943년 1월 말 히틀러는 파울루스 장군을 원수로 하고, 모든 부대원들을 1계급씩 진급시키는 특단의 대책으로 독전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예상을 깨고 소련군에 항복했다. 24명의 장군을 포함해 모두 9만1000여 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은 루마니아군 등 추축군을 합쳐 50여 만 명에 달했고, 이들 가운데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간 숫자는 6000명에 불과했다.



첫 네 음 리듬이 모르스 부호 ‘V’ 의미

‘운명’은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중 다섯 번째 곡(Symphony no.5 in C minor, op.67)이다. ‘운명’이라는 별칭은 직접 붙인 것이 아니다. 1악장 첫머리의 “바바바 밤” 하고 연주되는 인상적인 여덟 개 음(동기: 가락을 이어주는 최소 단위로 보통 2개 마디로 구성된다)을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평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작곡 시점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완성이 1808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베토벤은 이 곡으로 스승이었던 하이든과 맞먹을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정복당한 시기에 만들어져 게르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곡이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증거는 빈약하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할 에피소드를 보면 이 곡은 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다.

‘운명’은 모두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1악장의 동기도 중요하지만, 팡파르로 시작해 전쟁 승리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4악장 덕분에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초연 때 연주를 들은 한 노병이 “이건 황제다! 황제 만세!”를 외쳤다는 이야기 때문에 ‘황제 교향곡’으로도 불린다.

이후 전쟁과 관련돼 자주 연주되곤 했는데 2차 대전 때는 독일·오스트리아는 물론 미국·영국 등에서도 자주 애용됐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한 1943년 1월 31일, 청천벽력 같은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베를린 시내에는 하루종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흘렀다고 한다. 연합국에선 이런 배경에 더해, 1악장의 첫 네 음 리듬이 모르스 부호로 ‘승리(Victory)’의 첫 글자 ‘V’를 의미했기 때문에 승리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애창됐다. 오늘날 태평양전쟁 승전기념 연주회에선 ‘영웅 교향곡(베토벤의 3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유럽 전승기념 연주회에선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는 이유다. 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북극성안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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