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을 그린 화가들

한 컷의 ‘촌철살인’…세상을 날카롭게 풍자하다

입력 2016. 11. 2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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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나폴리’, ‘중국’, ‘유럽의 균형’, ‘비스마르크씨의 악몽, 고맙다’


4000여 점의 석판화 제작

프랑스 대표하는 정치풍자가

권력자·전쟁 등 부조리 비판

인간에 대한 사랑·통찰 담겨

 

 

가르강튀아, 1831, 석판

 

 

 

중국, 1858, 석판, 26 x 29㎝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작품 가운데는 판화 작품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오늘도 판화로 전쟁에 대한 의견을 남긴 작가를 만나볼까 하는데요. 바로 촌철살인의 통찰력으로 시대를 그려냈던 오노레 도미에(Honore Victorin Daumier·1808~1879)가 그 주인공입니다. 도미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치풍자가로, 잡지와 신문에 게재된 그의 판화는 지금의 시사만화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도미에는 국민의 편에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고 작품에 개혁의 뜻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유럽의 균형, 1867, 석판

 


가르강튀아-프랑스 국왕 등 권력자 비판

그의 대표적 작품이자 오늘 살펴볼 첫 작품이 ‘가르강튀아’입니다. ‘가르강튀아’는 도미에가 약관 23세에 제작한 ‘문제작’이었죠. 그는 이 작품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구속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강렬하고 거침없는 작품이 바로 ‘가르강튀아’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 1세입니다.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가 시행한 엄청난 세금 인상에 항의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죠. 그림 속에서 금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거대한 대식가가 바로 국왕이죠.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국왕이 배설한 쓰레기를 놓고 싸우는 의원들입니다. 도미에의 그림은 당연히 당시 권력층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그는 파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생트 펠라지 감옥에 6개월 동안 투옥됩니다. 도미에는 그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힘든 수감 생활에 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매력적인 휴양지다. 반대로만 될 수 있다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나폴리, 1851, 석판

나폴리- 자유주의자의 교수형을 보는 국왕

도미에가 프랑스 내부 문제에만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변국, 더 나아가 식민국의 상황도 동일한 시선으로 그렸죠. 교수형 당하는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발코니에서 구경하는 나폴리 국왕을 그린 ‘나폴리’에서는 국가를 넘어 인간에 관심을 보인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 각지에서 벌어진 독립투쟁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그 계기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3세는 곧바로 이탈리아에 군대를 파견해 로마 공화국부터 붕괴시켰습니다. 이는 군대를 다른 나라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데 사용해선 안 된다는 헌법을 위반한 행위였죠. 그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태들이 결국 프랑스와 관련이 있다고 고발합니다.

1852년 즉위한 나폴레옹 3세는 영토 팽창을 위해 식민지 전쟁에 몰두했습니다. 크림전쟁, 중국의 문호 개방, 베트남과 멕시코 점령 등이 그의 통치 시기에 벌어졌죠.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마네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도 바로 이 시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마네는 나폴레옹 3세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세우려다 실패한 사건을 신문기사로 접하고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 프랑스가 책임이 있음을 그렸었죠.

‘비스마르크씨의 악몽, 고맙다’, 1870, 석판

중국-아편을 이용한 열강 비판

이렇게 많은 전쟁이 있던 시기, 도미에는 중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주제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바로 아편전쟁이죠.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은 서구 열강에 강제로 문을 열게 됐는데요, 도미에의 작품을 보면 아편전쟁에 대해 모르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중국의 문호를 열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중국인은 아편을 먹기 위해 입을 쩍 벌리고 있죠.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입에 아편을 쏟아붓는 군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도미에는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마약까지 동원한 열강을 비판했죠. 사실 아편전쟁을 치르기 전 당사국인 영국에서는 이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편까지 동원해 전쟁을 치르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결국 전쟁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반대하던 이들 대부분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 국민의 고통에는 눈감아버리게 됩니다.



 

또 하나의 유럽의 균형, 1866, 석판



유럽의 균형-아슬아슬한 평화의 모습

다음 작품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유럽의 정세를 그린 ‘유럽의 균형’ 시리즈입니다. 도미에는 잠시 유럽에 찾아온 평화가 굉장히 아슬아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구 하나 방심하면 금방 깨어질 것 같은 기분은 총칼로 지구를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아슬아슬 공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으려는 여인의 모습에서도 쉽게 느껴집니다.



비스마르크씨의…-프로이센·프랑스의 전쟁

도미에의 생각처럼 유럽의 평화는 짧았습니다. 1868년 6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였고 1870년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을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나폴레옹 3세와 독일 부흥을 꿈꾸는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대립이 주된 원인이었죠. 그는 ‘비스마르크 씨의 악몽, 고맙다’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정면으로 비난했죠. 그림 속 비스마르크의 옆에는 사신의 낫을 든 해골이 미소를 짓고 있죠.

도미에는 187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00여 점의 석판화를 제작하며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 일부 권력자들의 욕심으로 벌어진 처참한 전쟁에 대한 비판도 계속했죠. 그의 비판은 단순한 비난과는 궤가 달랐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통찰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죠. 도미에가 세상을 떠난 뒤 헌정된 비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보라, 여기 한 명의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미술가이며, 최고의 시민이었던 도미에가 잠들어 있다.” 사진=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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