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원종원의 올 댓 뮤지컬

백석과 그의 하나뿐인 여인...가슴 아린 '사랑의 詩'

입력 2016. 11. 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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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000억 원이 그의 시 한 줄만 못하다”

기생 ‘자야’와의 애틋한 사연 무대에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뒷맛 깊게 남아

 

 




긴 제목의 소극장 창작 뮤지컬 한 편이 화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이국적인 이름의 여인과 뜬금없어 보이는 동물이 정말 무대에 등장할까?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무대에는 여인과 네발짐승이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제목은 사실 천재 시인이라 불렸던 백석 시인의 작품 제목을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훗날 그는 ‘흰 돌’이라는 의미의 필명 ‘백석(白石)’으로 활동했다.

백석의 작품세계는 주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민속이나 지역신, 민간신앙 등을 소재로 일반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이나 철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지역의 방언을 사용해 정감 어린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뮤지컬의 제목으로 쓰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시집 ‘사슴’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뮤지컬은 특히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김영한과의 사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가난했지만 멋쟁이 시인이었던 백석은 우연히 동향 출신의 기생이었던 김영한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좋아하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즐겼던 그는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오늘부터 당신이 내 아내니 우린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엉뚱하지만 순수한 모습에 자야는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백석의 엄한 고향 집 아버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을 정주로 끌고 와 고향 여인과 억지 결혼식을 올리게 한다. 첫날밤 도주를 반복하던 백석은 자야와 함께 만주로 떠나기로 하지만, 남과 북으로 갈려진 민족상잔의 비극 중에 헤어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결국 1996년 백석은 북한에서 명을 달리하게 되고, 자야는 1999년 남한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며 남쪽에서 살아가야 했던 자야는 당대 최고의 요정으로 손꼽히는 대원각을 운영하며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연인이 더는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시만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말년에 이를 조계종의 법정 스님에게 기탁해 사찰을 짓게 된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이다. 한때 종교에 귀의한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세상의 질문에 자야는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대답을 했다는 일화도 꽤 유명하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뮤지컬 무대를 통해 애틋한 사연으로 되살아나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뮤지컬을 보고 나면 길상사에 정말 한번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와 노래가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작지만 아담한 무대는 이 뮤지컬의 성격과 어울려 쏠쏠한 재미를 준다. 변화가 많고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대극장 무대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순수한 이야기에 걸맞게 관객들에게 ‘힐링’을 주는 듯한 이미지가 강렬하다. 미니멀리즘적인 재미도 근사하거니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의 색채가 뒤바뀌는 극 전개는 단출한 소극장 무대의 제약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십분 발산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구처럼, 극의 마지막에 무대 위 대나무 숲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진짜 눈을 소품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숲이 온통 하얗게 보일 정도로 환한 조명을 밝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묘사해낸다. 극을 따라가다 보면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이야기의 극적 구성에 어울리는 무대의 시각적 효과가 얼마나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작가, 각색가, 연출가로 활약하는 오세혁이 이 작품의 산파다. 그는 원래 백석 시인을 좋아해 가방 속에 시집을 넣어 다녔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백석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보고 감동하여 이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됐다는 후문이다. 음악은 요즘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박해림과 채한울이 참여했다. 피아노 한 대만으로 수수하고 담담하지만,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내는 체험을 선사한다.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담백하지만 서글픈 운명적 연인의 사랑 이야기와 잘 어우러져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뒷맛이 길게 남는다. 무대를 통한 ‘힐링’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감상 팁


시집을 읽고 보자

음반을 기념품으로 파는 대신 ‘나나흰’의 공연장에선 백석의 시집을 판매한다. 뮤지컬을 보기 전후에 찬찬히 읽어보면 작품의 향기가 훨씬 진해진다.



등장인물은 세 명

뮤지컬에는 시인 백석과 연인 자야 그리고 일인다역으로 등장하는 사내, 단 세 명만이 등장한다. 소극장 뮤지컬의 아기자기한 재미가 몰입도 높게 적절히 묘사된다.



길상사도 찾아보자

계절이 변할 때마다 길상사의 모습도 아름답게 치장된다. 자야와 백석의 이야기를 알고 찾아가면 왠지 슬픈 연인의 사연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욱 특별하다. 꼭 들러보기 바란다.

<원종원 교수 뮤지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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