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음악

불굴의 정신 보인 蘇, 기쁨과 환희의 찬가를 울리다

입력 2016. 11. 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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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치의 침략을 죽음으로 막아낸 전투를 표현하다


 

 


◀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 ‘바르바로사’

러시아는 영토가 넓은 만큼 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섣불리 침략했다가 호되게 당한 적도 많지만 스웨덴이나 몽골군에게 유린당한 경험도 있다. 20세기의 세계대전 역시 러시아를 가만두지 않았다. 1차 대전 때는 탄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섬멸돼 재기하지 못했다. 2차 대전은 달랐다. 전차·자주포·전투기 등 가공할 무기로 무장한 전례 없이 강력한 대규모 군대(독일 1800만, 소련 2900만)가 동부에서 격돌했고 결과는 독일의 참담한 패배였다. 1939년 독·소 양국은 불가침을 약속했다. 그러나 연합군을 도버해협으로 몰아낸 후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독일은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동쪽의 땅과 물자(곡창·유전·지하자원)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입안됐다. 독일군은 북부·중앙·남부의 3군으로 나눠 각각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 세 방향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 가운데 레닌그라드·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압권이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포위망 갇힌 시민들, 무려 2년5개월 역경 극복

북부 레닌그라드전투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리는 레닌그라드는 옛 러시아의 수도이자 발트 함대의 거점이며, 주요 산업 중심지다. 히틀러는 이 상징적인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우고, 일부는 핀란드에 반환하려 했다. 독일·핀란드 연합군은 시 전체를 포위하고, 통신망과 보급 일체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망에 갇힌 시민의 생활은 처절했다. 빵 배급을 줄이고, 겨울에 난방 없이 지내야 했으며, 의약품이 없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가용한 모든 민간인을 모아 도시를 둘러 요새를 구축하고, 대포·박격포 1000문을 만드는 등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1941년 9월 시작된 전투는 조기에 종결될 것처럼 보였지만 무려 2년5개월이 지난 1944년 1월, 872일 만에 독일군의 철수로 막을 내렸다. 그 기간에 독일군은 엄청난 폭탄을 레닌그라드에 퍼부었다. 공중폭격으로 10만 발, 대포로 15만 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트럭 운전사들은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호수를 통해 물자를 수송하고 피난민을 날랐다. 레닌그라드는 온갖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은 ‘영웅도시’ 칭호를 얻었다.

쇼스타코비치

 

치열한 전투 중에 탄생한 ‘전쟁 교향곡’

독일에 저항하는 레닌그라드 투쟁 표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품 성향이 체제가 지향하는 바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쟁교향곡’을 썼다.

독일의 공격과 이에 저항하는 레닌그라드 투쟁, 승리의 환희를 표현한 곡이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상황에서 곡을 완성했고, 한창 전투 중이던 닌그라드 시내에서 임시로 급조한 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기도 했다. 이 곡이 ‘레닌그라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끈질긴 소련군 저항… 전쟁사에 가장 참혹한 전투

남부 스탈린그라드전투

북부에 레닌그라드가 있다면 남부엔 스탈린그라드가 있다. 독일군에 긴요한 코카서스 유전이 위치한 전략 거점이자 스탈린 이름이 붙은 정치 요충지다. 우크라이나 일대를 확보한 독일군은 1941년 8월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했다.

폭격기와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에 맞서 소련군은 결사 항전했다. 독일의 무차별 공격에 시가지가 폐허가 되면 그 잔해를 이용해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시가전을 구사했다. 소련군은 독일 지상군과 근접함으로써 원거리 공격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했다. 또 군의 사기를 위해 피난을 불허하고, 무단 이탈자는 즉결 처분했다.

소련군은 24시간 이상 생존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지만 완강한 저항으로 전투는 해를 넘겼다. 예상치 못한 동계작전에 돌입하자 독일군은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전투력이 떨어졌다.

반면 소련군의 전력은 점점 강해졌다. 1942년 11월 대대적인 남북 협공으로 반격작전을 감행해 독일군의 주력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2월 살아남은 독일군은 항복을 택했다. 20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전투는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꼽힌다.

 

아람 하차투리안

교향곡의 대가…‘체제 옹호’ 작품 압박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 과정 곡에 담아

 

 

조지아의 아르메니아 가정에서 태어난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은 18세가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며 작곡 재능을 인정받았다. 전쟁 중에는 ‘가야네(Gayane)’를 선보여 국내외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쇼스타코비치 등과 함께 소련이 자랑하는 교향곡의 대가로 선정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음악계 숙청에 휘말려 ‘체제 옹호’ 성향의 작품을 써야 했다. 이때 만든 곡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음곡’이다. 이 곡은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볼가강에 위치한 평온한 스탈린그라드의 모습을 소개하고, 독일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참혹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죽음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낸 소련군의 활약상, 마침내 침략군을 물리친 승리의 기쁨과 환희를 담았다. 마지막은 죽음으로 지켜낸 불굴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듯 장엄한 분위기로 맺고 있다.


<윤동일 북극성 안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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