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존 하트필드 ‘전쟁과 시체-부자들의 희망’, ‘20년 후에’ ‘제네바의 교훈 : 자본이 사는 곳에서 평화는 살 수 없다’
독일 태생의 다다이스트
군인 출신이나 전쟁 경멸
237점 포토 몽타주 남겨
전쟁의 위험성·폐해 지적
참전을 계기로 전쟁의 참상을 그려냈던 다다이스트(Dadaist)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를 기억하시나요? 얼마 전 우리는 “막스 에른스트, 1914년 8월 1일 죽다”란 인상적인 문장을 남겼던 에른스트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오늘은 에른스트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또 다른 다다이스트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1891∼1968)의 삶과 작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번 에른스트와 마찬가지로 하트필드 역시 많은 작품에 포토 몽타주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잡지에 실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죠. 오늘 살펴볼 세 작품 또한 노동자들을 위한 화보 신문인 ‘AIZ(Arbeiter Illustrierte Zeitung)’에 실렸던 작품들입니다. 그럼 우선 하트필드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전쟁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트필드는 뮌헨 응용미술학교와 베를린 미술공예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그가 1930년 히틀러와 나치를 비판하는 AIZ에 몸담게 된 것은 그의 친동생이자 인생의 조력자였던 비란트(Wieland)의 영향이 컸죠. 하트필드는 AIZ가 폐간될 때까지 237점에 달하는 포토 몽타주를 선보였습니다. 대부분은 히틀러와 국제 정세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 ‘시각적 프로파간다’였죠.
하트필드는 8월에 소개했던 조지 그로스(George Grosz)와 상당히 친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죠. 바로 ‘개명’입니다. 독일인이었던 두 사람은 전쟁에 열광하는 독일을 경멸하며 1916년 동시에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꿨습니다. 헬무트 헤르츠펠데(Helmut Herzfelde)라고 불리던 이는 존 하트필드, 게오르크 에렌프리트 그로스(Georg Ehrenfried Groz)는 조지 그로스가 됐습니다.
하트필드 역시 그동안 살펴본 많은 작가들처럼 참전군인 출신입니다. 하트필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징용돼 2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합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에서 그로스를 만납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1918년 베를린 다다 그룹을 결성하고 냉혹한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특히 하트필드는 다다이스트들의 대표적인 기법인 포토 몽타주를 이용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트필드는 1차 대전이라는 불행을 가져온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와 전쟁을 비판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전쟁과 시체-부자들의 희망’이죠. 먹잇감을 찾아 시체로 뒤덮인 들판을 가로지르는 하이에나를 통해 하트필드는 전쟁의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조국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간 시신들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의 대비된 모습을 통해서 말이죠. 하이에나는 자본주의를 상징합니다. 훈장을 목에 매달고 중절모를 쓴 채 시신으로 뒤덮인 들판을 어슬렁대는 하이에나는 전쟁이란 비극적 결말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자본가들의 추악함을 풍자합니다. 동료인 그로스 역시 우리가 이미 살펴본 ‘일식’에서 같은 자세를 취하죠.
하트필드는 1934년, 1차 대전 발발 20주년을 기념해 ‘20년 후에’라는 작품을 특별 제작했습니다. 줄지어 늘어선 해골의 그로테스크한 모습 아래로 제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보이시나요? 해골은 이 아이들의 20년 후 모습이라는 끔찍한 미래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삶과 죽음의 대비되는 이미지가 강렬하죠. 아이들의 오른편에는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나치의 멤버로 활동한 칼 리츠만 대장을 위치시켰습니다. 이제 하트필드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짐작이 가시죠? 하트필드는 한 세대를 희생시키고도 여전히 살아남은 인물을 통해 군국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작품이 실린 잡지에는 1932년 일본이 점령한 하얼빈의 신문에서 발췌한 의미심장한 글이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세 살짜리 꼬마라도 전쟁놀이를 할 때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전쟁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주입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하트필드와 AIZ는 1차 대전을 비판하는 동시에 독일과 일본에 의해 시작될 또 다른 전쟁을 경고한 것이죠.
마지막 작품인 ‘제네바의 교훈: 자본이 사는 곳에서 평화는 살 수 없다’에서는 전쟁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이 더 강렬히 나타납니다. 하트필드는 이 작품에서 비둘기가 파시스트의 총검에 꽂힌 채 죽어있는 이미지를 구현합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전쟁을 상징하는 총검을 대비시켜 비극적인 전쟁에 대한 반발을 드러낸 것이죠.
하트필드나 그로스, 에른스트 모두 1·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에서 나고 자란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열기에 휩싸인 많은 독일인이 군국주의를 찬양하던 시절, 이들은 전쟁의 위험성과 폐해를 지적하기 위해 애썼죠. 모두가 눈감고 외면하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어려운 작업을 평생 실천한 하트필드의 모습을 통해 저는 오늘 예술가가 걸어야 하는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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