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박희의 한국사 명장열전

이순신 장군이 후임자로 점찍은 ‘해전의 신’

입력 2016. 11. 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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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임진왜란 때 제해권을 장악한 이운룡


원균 패한 뒤 이순신에 원군 요청

옥포·영등포·사천·진해서 큰 승리

 




이운룡(李雲龍·1562~1610)의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자는 경현(景見)이며 호는 동계(東溪)로 청도 출신이다. 1585년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됐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남 일대가 허무하게 무너졌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원균은 비겁한 인물이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다.

이에 옥포만호 이운룡이 “사군(使君·임금의 명을 받들어 나라 밖으로나 지방에 온 사신의 경칭)은 국가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의리로 볼 때 자신의 관할 지역을 사수하는 것이 마땅하오. 이 지역은 바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 전라도와 충청도임)의 요충인데 이곳이 무너지면 양호도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소. 우리 비록 피폐해졌다고 하나 병력을 모으면 지킬 수가 있고 또 호남의 수군은 완전하니 증원군대를 청원해서 견내량(見乃梁)을 차단하여 적이 거제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충분하오. 그런데도 공은 지금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려 하시오?”라고 항의했다.

원균이 성을 내며 “호남의 군대를 당신이 청해 올 수 있겠소?”라 대꾸했다. 이는 자신과 이순신의 껄끄러운 관계를 유념한 말이다. 이운룡이 “사군이 나에게 명령만 내린다면 어찌 사양하겠소?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이 평소 그쪽 군대를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시키는 것이 좋겠소” 하자 원균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이운룡이 즉시 영등포(경상도 거제현에 있던 포구)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거제로 가서 현령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왜적을 토벌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뒤 바다로 나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율포만호 이영남이 호남에 가서 계획을 이야기하니 좌수사 이순신이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원균은 일단 사신을 보내 놓고도 일이 잘되지 않으리라고 간주하고 나머지 부대를 인솔해 남해로 도피 항해하고 있었다. 마침 호남의 군대를 만나자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돌아왔다.

1592년 5월 10일에 이운룡이 군대를 모아 옥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왜적이 달아나 해안으로 오르기에 적선 50척을 모두 불사르고 돌아왔다. 영등포 앞바다의 전투에서도 10여 척의 적선을 불태웠다.

이날 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이 모두 울었고 호남의 군대도 돌아갔다. 원균이 또 도망치려 하자 이운룡이 강력하게 항의해 만류했다. 이운룡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규합한 뒤 육지와 바다를 왕래하면서 적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다시 호남의 군대와 연합한 뒤 사천(泗川)에 진을 친 왜적을 향해 진격해 대포를 쏘아 누선(樓船·다락이 있는 배)을 박살 내자 왜적이 크게 무너졌다. 호남 우수사 이억기(李億祺)도 와 있었기에 사기충천했다.

6월 진해의 왜적을 공격했다. 이운룡이 우치적과 함께 온종일 육박전을 벌인 끝에 왜적의 누선을 차례로 격파하자 왜적들이 당황해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7월에 적선 수백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려 했다. 이운룡이 장병과 계책을 정한 뒤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물러나 바깥 바다로 유인한 뒤 합동으로 공격했다. 대포의 화염으로 바다가 끓어오르면서 왜적이 크게 섬멸돼 파도가 온통 붉은빛으로 변했다.

이때 원균은 노량(露梁)에 정박해 있기도 하고 남해로 떠나기도 하면서 오직 호남의 군대가 진퇴하는 것을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이순신은 원균을 싫어하고 이운룡을 훌륭하게 평가했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 이운룡의 전공을 열거해 체부(體府·체찰사가 지방에 나가 일을 보던 관아)에 보고한 뒤 장차 이운룡을 천거해 자신의 후임자로 삼으려 했다.

1595년 품계가 통정대부로 올랐다. 1596년에 경상 좌수사를 제수받은 뒤 염포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에게 시달린 백성들을 불러모아 안정시켰으며 전함(戰艦)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신명을 다했던 이운룡의 전공(戰功)은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며 오늘날 호국 안보에 꼭 필요한 교훈들이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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