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음악

대포·나팔소리…생생한 나폴레옹 전투를 귀로 듣다

입력 2016. 11. 0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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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계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전쟁음악’


1813년 비토리아 전투. 베토벤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곡 ‘웰링턴의 승리’를 작곡했다.

 

 

 

 


지금까지 ‘전쟁+음악’의 오랜 역사를 더듬어 그 흔적을 살피고, 전쟁이나 국가 차원에서 음악이 하는 역할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소개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오늘부터는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군·군인·전쟁’은 음악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소재 등)을 담당해 왔는데도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통상 ‘전쟁과 관련된 음악’ 하면 행진곡을 떠올린다. 그러나 ‘전쟁음악’은 교향곡이나 오페라는 물론 레퀴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장르)으로 창작됐고, 모차르트·바그너·베토벤·차이콥스키 등 당대의 거장들이 참여해 상당수 작품이 명곡의 반열에 올라 있다. 전쟁음악이 어떤 시대적 상황과 전쟁을 반영하고 있고, 어떤 작곡 의도가 숨어 있는지 등을 확인해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여러 접근 방식이 있지만 지면이 제한돼 있으므로 클래식·대중음악·군가 등으로 구분해 살펴보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Victory)

영국의 자축·환희 담은 선율…청각 장애 딛고 작곡·지휘

 


베토벤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른 직후부터 스페인을 침공하기 전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했다. 서로는 스페인, 동으로는 바르샤바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바다 건너 영국은 여전히 영향력 밖에 있었다. 영국은 자국을 겨냥한 ‘대륙봉쇄’ 조치가 취해지자 해양을 통한 역봉쇄로 맞섰다. 1807년 영국과 교역을 시도했다는 것을 구실로 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왕을 폐위시키자 저항의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이듬해 영국은 이곳에 군대를 보내 대불(對佛)전선을 펼치며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영국군은 1810년부터 3년간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고, 드디어 1813년 양군은 비토리아(Vitoria) 분지에서 결전에 돌입한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침략군을 물리치고 빼앗긴 지역을 회복했으며 프랑스군을 피레네 산맥 너머로 몰아낼 수 있었다. 당시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에게 일침을 가하고, 웰링턴을 세계에 알린 바로 그 ‘비토리아 전투’다.

1813년 베토벤은 메트로놈을 만든 멜첼의 의뢰로 이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곡 ‘웰링턴의 승리’를 만들었다. ‘전쟁터’라는 부제가 붙은 1부는 전장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는데, 양군의 진영과 진군 그리고 선전포고에 이어 전투와 돌격 등 7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특히 북과 트럼펫을 사용해 양군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2부에서는 영국군의 대포 소리가 커지면서 프랑스군 진영의 신음 소리가 고조되고 마침내 영국 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승리를 축하하고 환희를 표현한다. 이 곡을 ‘승리교향곡(Victory Symphony)’으로 부르는 이유다.

‘웰링턴의 승리’는 무엇보다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한 음악적 배려가 돋보인다. 이를 위해 다수의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동원됐는데, 팡파르와 진군나팔 그리고 대포를 묘사한 악기들은 뒤에 배치하고, 앞에는 근접전투와 이로 인한 부상자들의 절규 등을 표현하는 악기를 배치했다.

1부에서 양군의 팽팽한 공방전을 그리기 위해 악기와 연주자 수를 균등 편성하는 세밀함도 돋보였다. 아울러 양국 국가를 삽입해 두 나라 간 경쟁과 전투 효과를 배가시켰다. 물론 2부에는 승자 쪽에 많은 비중을 뒀다.

빈에서 열린 ‘하나우 전투 참전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음악회에서 초연됐는데 베토벤이 직접 지휘하고 당대 유명 연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 보청기에 의존한 시기여서 더욱 감동적이다.

 

 

1812년 서곡(1812 Overture)

치열한 공방전 후 전투의 승리 표현 ‘묘사음악의 백미’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중이던 1812년 진행된 보로디노 전투의 모습. 차이콥스키는 대포소리를 묘사한 ‘1812년 서곡’으로 이 전투를 기념했다.

 

 

 


영국 봉쇄에 실패하고 스페인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면서 유럽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은 난관이 많아 보였다.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였는데 비밀리에 영국과 거래한 사실이 발각돼 나폴레옹의 분노를 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동맹국군을 포함해 무려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히 동토의 땅 러시아를 향해 진군했다. 개전 초기 불과 4주 만에 321㎞를 진군한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무혈점령해 전세가 상당히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는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러시아의 전략에 당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적의 진군로에 있는 모든 가옥과 식량을 사전에 불태워 이용 여지를 주지 않는 이른바 ‘초토화 전략’을 썼고,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프랑스군은 5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러시아 원정의 재앙은 모스크바로부터 110㎞ 서쪽에 위치한 ‘보로디노(Borodino)’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곳에서 힘겹게 승리는 쟁취했지만, 추위와 열악한 보급으로 프랑스의 전력 손실은 날로 심해졌다. 특히 전투 중 감기에 걸린 나폴레옹은 중요한 국면에서 전투지휘를 소홀히 했고, 결국 러시아 전역 전반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은 1882년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차이콥스키가 단기간에 완성한 곡인데, 이 전쟁에서 화재로 불타 버린 모스크바 중앙 대사원의 재건 기념 연주회 때 처음 소개됐다. 이 곡은 ‘웰링턴의 승리’와 작곡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모로 닮았다.

신호 나팔로 양군의 진군과 전투가 시작되고, 치열한 공방전 후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구성은 그리 다르지 않다. 양국 국가도 삽입해 그 효과를 배가시켰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전투 장면에서 당시 사용한 양군의 대포 소리와 총소리를 차용해 사실적인 효과를 극대화시켰고, 클라이맥스에서는 4개의 러시아 전통 민속선율이 프랑스 국가(라 마르세예즈)를 압도해 잠식·대체함으로써 러시아 승리로 귀착되는 결말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투 역시 기본적으로 금관악기와 타악기로 묘사하고, 대포 소리와 베이스트롬본·스네어드럼·종 등을 추가해 세밀함을 더했다. 특히 16발의 대포 소리는 압권이다. 리얼한 전투 장면을 표현한 ‘묘사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러시아의 자부심이기도 한 이 곡은 각종 행사나 연주회에 감초처럼 등장하는데,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처럼 성악으로 애창되기도 하고, 톨스토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전쟁과 평화(프로코피예프 작곡)’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윤동일 북극성 안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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