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신종태 교수의 태평양전쟁 전사적지를 찾아서

생생한 한국인 징용 기록 ‘뜻밖’… 군 위안소 지도까지

입력 2016. 09. 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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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키나와 평화기념관②


각종 전쟁유물 등 자료 가득

오키나와 전투 사망자 총 24만여 명

 

가미카제 한인 조종사 20명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본 전쟁책임 언급 없어

 

 

 


 

 

 



태평양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두고 있는 오키나와 남단 해변의 평화기념관! 야외 기념공원 언덕에는 24만 명의 오키나와전투 사망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추모비가 시퍼런 바다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전쟁역사로 채워진 오키나와 평화기념관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은 종전 50주년이 되는 1995년 6월 23일 오키나와 현이 건립했다. 넓은 야외공원에는 수백 개의 검은 대리석비에 전쟁 희생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한국인 위령탑 공원’은 기념관 입구 길목에 커다란 돌무덤으로 별도 조성돼 있다. 오키나와전투 사망자는 연합군·일본군·민간인을 모두 합쳐 무려 24만1227명!

기념관 내부전시물은 청일·러일전쟁, 만주사변·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 군국주의 역사를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잘 정리돼 있었다. 또한, 각종 전쟁유물, 한국인 징용자·위안부 실상, 전시 일본사회 현실 등의 사진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더구나 이 섬 안의 일본군 위안소 위치가 세부적으로 표시된 지도까지 있었다.


특공작전을 위해 훈련 중인 일본군 조종사들.

 

 

 


44개소의 오키나와 일본군 위안소

전쟁이 끝난 지 71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로 숱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에선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 있었던 44개소 위안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가족협의회 회장 양순임(71) 씨는 오랫동안 한(恨) 많은 위안부 할머니 사연들을 수집해 왔다. 그 자료에는 14세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강○○ 할머니 사연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처녀들을 강제 차출해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어린 나이지만 결혼한 여자로 위장해 산속 상엿집에 숨어 살았다. 그런데 전시 식량 배급은 마을에서 떨어진 기차역에서 이루어졌다. 밀가루를 얻기 위해 할머니가 갔지만, 일본국가(기미가요)를 부르지 못해 허탕 치고 돌아오곤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할머니 대신 역으로 나갔고 노래를 잘 불렀다고 식량 외에 고무신과 통조림까지 상품으로 받았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로 퍼져 나갔고 숨어있던 어린 소녀들이 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선물은 일본 경찰의 달콤한 미끼였다. 어느 날 그 역에서만 35명의 처녀가 위안부로 납치되었다. 그녀는 태평양 어느 섬에서 생활했는지도 모른다. 오직 가축처럼 오두막에 감금되어 일본군 성노리개로 강○○ 할머니의 꽃다운 청춘은 이렇게 잔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가미카제 특공대와 한인 조종사의 비운

1945년 4월 6일, 일본군 특공기 2000여 대가 오키나와전투에 투입됐다. 미친 듯이 목표를 향해 내리꽂히는 일본기에 대공포는 불을 뿜었지만, 경항모를 포함한 다수의 미 군함이 침몰했다. 그러나 250㎏의 폭탄을 단 일본 특공기들은 기동의 어려움으로 대부분 격추당했다.

기념관 자료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원 훈련 사진도 일부 남아있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비행사는 ‘일본 소년비행학교’나 ‘특별조종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양성됐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창공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던 한인(韓人) 조종사 중 20명이 특공작전에 강제 동원돼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야스쿠니 신사에 비치된 일부 한국인 특공대원 명단과 사진을 없애달라는 요구를 일본 정부는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다.



오키나와전투 후 미군에게 포로가 된 강제 징용자. 일본군은 나이 많은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켰다.

 

 

 

전범 국가의 면죄부, 샌프란시스코 조약

안타깝게도 태평양전쟁 일본 전범자들은 전후 찾아온 냉전으로 대부분 면죄부를 받고 풀려났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뒤이어 공직에서 추방당한 전범 정치인들이 속속 정계로 복귀했다. 사실 1951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너무나 관대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에는 매일같이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몰려든다. 재잘거리며 전시관과 야외공원을 돌아보는 그들은 과거 전쟁역사보다는 파란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주변 경치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과연 일본은 전쟁 도발의 책임을 후세들에게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하게 느껴졌다. 사진=필자 제공

 

TIP 태평양 전쟁 수감자 전원 석방1만여 명은 다시 권력 잡아 


1948년 11월 12일, 도쿄 전범재판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원수 등 7명은 교수형이 집행됐고, 16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10월, 수감자 전원이 석방되고 공직추방 전범자 1만여 명이 모두 복권됐다. 결국, 일본의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왕년의 ‘전쟁 범죄자’들이 최고 권력을 다시 잡게 된 것이다.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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