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유라시아 전사적지를 찾아서

참혹한 참호전 속에서도 신사도를 지켰다니…

입력 2016. 07. 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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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터키 ⑥


1915년 연합군 갈리폴리 반도 공격

불과 10m 거리 두고 치열한 혈전

휴전땐 부상 적군 상대 진지로 이송

담배·초콜릿 서로 주고받기도 해

 

 

‘신사의 전쟁’을 상징하는 동상. 터키군이 부상당한 영국군을 치료한 뒤 상대편 진지로 안고 가는 모습이다.

 

 

 

터키 정부는 1980년 갈리폴리(Gallipoli) 반도 전체를 역사기념공원으로 지정했다. 1915년 4월 25일 새벽, 연합군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쌍방 9개월간의 혈전이 계속된 지역이다. 매년 4월이면 터키·영국·호주·뉴질랜드·프랑스 추모객들로 이곳은 북새통을 이룬다.

전쟁 역사에 관심이 많은 뉴질랜드 부부

차낙칼레는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여행객이 수시로 몰려든다. 특히 매년 4월 25일 ‘안자크(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날’ 전후에는 몰려드는 단체손님으로 여행사는 홍역을 치른다. 이 도시의 모든 호텔에서는 관심 있는 전적지를 이야기하면 교통편·숙식 등을 개인 사정에 맞게 답사코스를 정해준다.

호텔이 지정해준 시간에 부두에 나가니 벌써 10여 명의 여행객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갈리폴리까지는 카페리로 약 50분이 걸린다. 답사팀에 합류한 뉴질랜드인 오멘시(Omensh) 부부는 참전용사 후손도 아니었다. 단지 휴가 기간 중 100여 년 전 선조들이 피를 흘린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 갈리폴리로 간다고 했다.



갈리폴리 반도 능선의 교통호 흔적. 이곳에는 100년 전에 만들어진 교통호와 참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준비되지 않은 무모한 연합군 상륙작전

1915년 2월 19일, 영국 해군장관 처칠(Churchill)은 육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함 18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이스탄불 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이미 다르다넬스 해안에 요새 건설과 수백 개의 기뢰, 잠수함 침투 방지망까지 설치했다. 결국 해군 작전의 실패로 영국은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이 당시 영국군은 훈련된 병력, 상륙작전 전례 분석, 군수지원 등 어느 한 가지 준비된 것이 없었다. 심지어 갈리폴리 반도의 군사지도조차 없어 여행책자를 이용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1915년 4월 25일 새벽, 36척 함정에 분승한 상륙부대 제1파 호주·뉴질랜드·인도군 1만6000명이 해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등성의 터키군 8000명이 내뿜는 화력을 연합군은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다. 안내자는 당시 전장 상황이 담긴 흑백사진첩을 수시로 보여준다. 좁은 해안에 빽빽하게 쌓아둔 보급품, 나귀가 후송하는 부상병은 그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갈리폴리 반도 능선 정상에 있는 터키군 묘역.

 

 

 

‘외로운 소나무’와 호주 소년병 이야기

연합군이 최초 상륙한 안자크(Anzac)만에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전사자 묘비들이 줄지어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전쟁 관련국 수반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한다고 한다. 다시 버스가 해안도로를 벗어나 산 능선으로 올라가니 ‘외로운 소나무(Lone Pine)’ 전사자 묘역이 나타났다. 갈리폴리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황토밭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소나무는 연합군의 중요한 포병사격 참고점이었다. 나중에 이를 눈치챈 터키군은 이 나무를 싹둑 잘라 화목으로 처넣었다. 또한, 이 묘역에는 애국심으로 충만한 소년병의 애틋한 사연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호주군 제21보병대대 마틴(Martin) 이등병은 나이가 14세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무서운 전쟁터는 이 어린 소년이 적응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마침내 열악한 환경으로 그는 심한 장염에 걸렸으나 군의관에게 가지 않았다. 자신의 나이가 알려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병세가 악화돼 의무실로 갔으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도 많은 소년병이 전사했다고 한다.



적진 거리 10m를 두고 벌어진 참호전

반도의 능선에는 포장된 2차로 도로가 길게 뻗어있다. 주변에는 100년 전의 교통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터키군은 서로 대치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는 불과 10m! 고개를 들면 그대로 저격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바탕의 격전이 있고 난 뒤 짧은 휴전 기간 서로 적군 부상자를 상대편 진지로 이송해 주기도 했다. 심지어 담배나 초콜릿을 도로 너머 적 진지로 던져주기도 했단다. 그래서 이 갈리폴리전투를 ‘신사의 전쟁(Gentleman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합군 부상자를 안고 있는 터키군 동상이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갈리폴리전투의 마지막 생존자 유언

능선의 최정상 전사자 묘역에는 갈리폴리전투의 마지막 터키군 생존자 동상이 있다. 1915년 당시 20세였던 그는 발칸전쟁과 갈리폴리전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2005년 11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 노병은 후손들에게 “전쟁의 비극이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인류 역사는 전쟁이 끝나면 모든 국가가 “두 번 다시 전쟁하지 말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부산을 떤다. 그러나 그 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이 지구 상 곳곳에는 전쟁이 반복되곤 했다.

TIP -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이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4월 25일, 연합군이 오스만제국의 갈리폴리 반도에서 벌인 상륙작전이다. 이곳에서 성공적인 방어작전을 펼친 무스타파 케말 대령은 일약 오스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결국, 1916년 1월 9일 연합군 철수로 전투는 끝났고 양측 사상자는 약 50만 명에 달했다.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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