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유라시아 전사적지를 찾아서

최정예 ‘예니체리’ 있어 최강국 오스만제국 있었네!

입력 2016. 06. 26   16:59
0 댓글

<11> 터키 ⑤


기독교 청소년 중 선발 이슬람 개종

혹독한 훈련 통해 최고 전투원으로 파격적인 특권 주면서 엄격한 규율

유럽·서아시아 지배한 대제국 건설

 

 

 

이스탄불 근교 해변의 오스만제국 성곽. 터키에서는 이스탄불이나 지방도시 곳곳에서 이런 성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터키 곳곳에는 수백 년 전에 축성된 많은 성벽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다르다넬스해협 입구의 차나칼레에는 트로이 목마 성과 제1차 세계대전기념관이 있다. 이런 군사유적들을 보면서 오스만제국은 평시부터 전쟁 대비와 강병 육성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 건설의 일등공신 ‘예니체리’

오스만제국의 최정예 정규군 예니체리! 이들은 600년간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지배하며 오스만을 대제국 반열에 올린 일등공신이다. 특히 이 부대의 충원방식은 독특했다. 3∼5년 간격으로 전국에서 가장 우수하고 건강한 기독교도 청소년들을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했다. 선발된 인원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정예 전투원으로 변신시켰다.

이들에게는 파격적인 특권을 줬고 대신 부대 군율은 엄격했다. 사소한 부정행위도 사형으로 다스렸다. 이 정예군이 앞장서는 오스만의 전쟁은 연전연승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핵심권력층으로 부상한 이들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결국, 예니체리는 술탄마저 통제했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에만 매달렸다. 약 400년 동안 온갖 특혜를 누려온 예니체리군이 탐욕의 집단으로 변하자 오스만제국도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통의 터키 공군 역사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인류 세계에 각종 신무기가 속속 등장했다. 비록 오스만제국은 정치·사회적 모순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군 육성에는 관심이 많았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있는 터키 공군 군사박물관! 넓은 야외광장에는 60여 대의 항공기가 진열돼 있고 전시관은 터키 공군 역사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터키 항공부대는 1911년 1월 1일 최초로 창설됐다. 목재와 천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항공기였지만 국민은 새로운 군사장비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10월 5일, 이스탄불 상공에 5대의 영국 공군기가 나타났다. 터키 공군의 영웅 파질(Fazil) 대위는 즉각 출격해 시민들이 생생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적기를 요격했다.”

그 이후 터키는 1936년 비행학교를 설립해 1943년까지 290명의 조종사를 배출했다.



차나칼레시 청사 앞의 트로이 목마 상.

 

 

 

양동작전의 표본 트로이 목마 상 유적지

다르다넬스해협 입구의 차나칼레(Canakkale)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시아와 유럽의 물류거점이다. 특히 이곳 트로이 목마 상은 양동작전의 대표적인 전쟁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200년께 그리스와 트로이 간 10년 전쟁이 있었다. 그리스군은 강력한 성에 의존한 트로이군을 도저히 격멸할 수 없었다. 이에 그리스 장수 오디세이아는 거대한 목마를 성 앞에 두고 조용히 바다를 건너 철수한 것처럼 적을 속였다. 그리스군은 교묘하게 위장포로 1명도 트로이군에게 넘겼다. 이 포로는 목마가 아테네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물이라고 진술했다. 목마를 불태워 없애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트로이군은 승리의 징표로 두기로 했다. 목마는 적진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성안은 승리의 대향연이 벌어졌다. 한밤중 조용히 목마에서 나온 그리스군 기습으로 트로이군은 몰살당했다.”

이 내용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쓴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Ilias)’의 일부다. 현장에는 수천 년 전의 트로이 성터와 많은 로마유적이 복원돼 있었다.



성곽 요새 속의 제1차 세계대전 기념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연합군은 동부전선 러시아군 지원을 위해 다르다넬스해협과 흑해를 연결하는 해상보급로를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이 해협을 통과해 이스탄불로 진격하려는 연합군 계획은 좌절됐다. 결국, 1915년 건너편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으로 쌍방 50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1년 동안 계속됐다.

차나칼레 요새 안에는 제1차 세계대전 기념관이 있다. 성곽 크기는 가로 150m, 세로 100m, 성벽은 8m에 달했다. 당시 성곽 안의 육상포대는 연합군 전함의 해협 통과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대구경 함포들도 대응포격을 했지만, 함정 피해는 막심했다. 더구나 오스만군은 좁은 해협에 400여 개의 기뢰까지 설치했다. 이 전투의 실패로 연합군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더 큰 재앙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박물관 성벽에는 100년 전 영국 군함 엘리자베스호가 발사한 38cm 대구경 포탄 1발이 아직 박혀 있어 당시 전투의 치열함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터키 공군 군사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는 항공기들.

 

 

 

한국어를 배우려는 터키 해군 수병

차나칼레 전쟁기념관의 안내병사 셀렌크(Selenk·25)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했다. 그가 다녔던 대학에는 유독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한류열풍에 매료돼 한국어 공부까지 열심히 했단다. 약간은 어눌하지만, 한국말을 수시로 사용해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더구나 발음교정까지 부탁하니 흡사 내가 그 수병을 안내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자신의 유학 시절 일부 한국 학생들이 군 복무를 위해 귀국하는 것을 보고 진한 동료애를 느끼기도 했단다. 터키의 한적한 도시에서 이처럼 한국말을 하는 터키 군인을 만나니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