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내주교수의 세계사 속 전쟁과 무기

3일 간격 두 차례 ‘흰 버섯구름’… 2차 세계대전 종결

입력 2016. 06. 2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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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1945.8) (하)


 

원폭 개발 연구 중이던 영국 연구 결과 美에 일괄 이관

美 과학자 개발 연구 박차

 

1942년 9월 美 원폭 개발계획 기구 ‘맨해튼 프로젝트’ 출범

1945년 7월 성능 폭발 실험 대성공

1945년 8월 인류 상대 최초 日 투하

 

 


 

 

● 무기와 무기체계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린 B-29 폭격기 1대가 폴 티베츠 대령의 지휘하에 폭발 실험에 갓 성공한 신무기 원자폭탄을 싣고 일본 본토로 날아갔다. 화창한 여름 아침 8시경, B-29 폭격기 조준병은 4500㎏이나 되는 비대한 어뢰 모양의 폭탄을 눈 아래 펼쳐진 일본의 공업도시 히로시마의 상공에 떨어뜨렸다. 이로부터 채 1분도 안 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인류를 상대로 폭발했다. 한순간의 강력한 섬광이 뻗친 후 히로시마는 흡사 지구 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유령도시로 변했다. 극심한 열기와 시속 800㎞의 엄청난 강풍에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을 비롯한 모든 물체가 바스러졌다. 이후 전 세계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처럼 각인된 흰 버섯구름이 지상 1200m 높이로 치솟았다. 이날의 전율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일 후 또 다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불과 사흘 사이에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원폭 투하 직후 두 도시의 모습은 한마디로 ‘지옥도(地獄圖)’ 그 자체였다.



원자폭탄 개발 배경

이처럼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기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일까? 흔히 원자폭탄 개발 과업은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일군의 미국 과학자들이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의 역사는 알려진 것보다 오래됐다. 원리적으로 원폭 개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1938년 독일 과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에 의한 우라늄235의 연쇄 핵반응 실험 성공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물리학자들 중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진 위그너와 레오 질라르드가 독일의 원폭 선(先)개발 가능성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아인슈타인의 세계적 명성을 등에 업고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 서한이 계기가 돼 1939년 우라늄위원회가 설치됐다. 하지만 1941년에 이르기까지 원폭 개발 이슈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고 같은 달 독일마저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상황이 급속도로 호전(好轉)됐다. 이러한 외적 환경변화에 더해 무엇보다도 원폭 개발 연구에 먼저 착수했던 영국 정부가 그동안 자국 과학자들이 이룩한 연구 결과를 미국 측에 일괄 이관해준 게 커다란 도움이 됐다. 여기에는 우라늄뿐만 아니라 플루토늄도 원자폭탄의 원료가 될 수 있다는 최고급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받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콤프턴이 있던 시카고대학교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이론적·실험적 연구를 수행해 개발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때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엔리코 페르미와 질라르드를 비롯한 저명한 핵물리학자들이 연구팀에 합류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2년 9월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로 알려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 기구가 출범했다. 처음에 준비위원회가 뉴욕의 맨해튼에 있었기에 그렇게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후 실제 주요 관련 시설들은 테네시주의 오크리지, 워싱턴주의 핸퍼드, 그리고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에 위치했다.

‘기술과 과학의 서커스’라는 당대의 평가처럼, 맨해튼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조직은 크게 둘로 구분됐다. 미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재정을 비롯한 개발과정 전체를 총괄적으로 책임졌고, 개발 관련 과학기술 분야는 시카고대학교의 콤프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이 담당했다.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두 실력자 간에 연구방향을 둘러싸고 이견과 갈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원폭 제조에 필요한 원료인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정제(精製)하기 위한 핵연료 생산공장 건설을 위해 듀폰, 웨스팅하우스, GE 등 민간 기업체들이 참여하게 됐다. 이렇게 점차 규모가 확대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는 한창 절정기에는 20억 달러 이상의 국가 예산과 60만 명 이상의 인력을 고용한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개발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1944년 여름에 이르러 이러한 난제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는 뉴멕시코주의 외딴 도시 로스앨러모스에 비밀리에 건설된 공장에서 원자폭탄 제조 공정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42년 가을에 출범한 이래 맨해튼 프로젝트는 원칙적으로 미국 부통령과 영국 부총리에게도 기밀로 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조치하에서 진행됐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급서(急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그때야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엄청난 비밀 과업에 대해 알게 됐다. 마침내 1945년 7월 16일, 로스앨러모스의 외딴 사막에서 원자폭탄 성능 폭발 실험이 실시됐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폭탄을 지탱한 철탑이 송두리째 녹아 없어질 정도로 폭탄의 위력은 강력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가공할 괴물을 과연 실전에서 사용할 것인가였다.

숙고 끝에 미국 정부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 시 희생될 엄청난 인명을 구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명분 아래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충격을 받은 일부 과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애초 개발 목적에 따라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렸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왕(日王)의 육성 방송에 이어 1945년 9월 2일 일본 대표단이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정식 서명했다. 이로써 5년 이상이나 끌어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됐다.



● 의미와 교훈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인적·물적 자원이 동원된 총력전이었다. 약 50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됐고, 물적 손실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했다. 전쟁의 결과 19세기 말 이래 약소민족들을 지배해 왔던 서양 제국주의가 종식을 고하고 식민지들이 압제의 질곡에서 벗어났다. 세계인들은 유엔을 창설해 국제적 차원의 안전보장 및 평화유지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전 후의 세계는 기대처럼 장밋빛이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대전 중의 협력 분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냉전(冷戰)’ 시대가 개막됐다. 그런데 문제는 제2차 대전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원자폭탄이 종전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후 미·소(美·蘇)의 경쟁적 대립 구도하에서 더욱 강력해져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공포의 무기’로 군림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우리와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 독재정권마저 핵무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바 각별한 관심과 대응이 요구된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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