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내주교수의 세계사 속 전쟁과 무기

‘암호명 D-데이’… 獨 패망 앞당긴 지상 최대 작전

입력 2016. 05. 3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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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 6. 6) (상)


獨 방어태세 약한 지역 ‘노르망디’

美·英 주력 2개 군 상륙부대 편성

 

5100여 척 함정, 7500대 항공기

폭격기 3500대 , 차량 50만 대

연인원 400만 명이 동원·참여

 

항공기나 글라이더 이용해

독일에 공수부대 투입한 입체

전후방지역 교란·통신망 제거

 

 



그동안 유럽에서 홀로 버티고 있던 영국은 1941년 말 미국의 참전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도 수세에 처했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사수에 성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1942년 여름 이후 유럽 전선에서 전황은 연합군에 유리한 형세였다. 1943년에 접어들어 연합군은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밀어붙이고, 서쪽에서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미·영(美·英) 연합군이 남부 이탈리아로부터 북상하는 등 독일군에 대항해 승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히 서부전선의 경우, 독일군 주력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채 북해와 대서양에 연한 해안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군의 방어망을 뚫고 북프랑스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 이후 유럽대륙 깊숙이 진격해 종국에는 독일 패망을 앞당긴 역사적 대모험이 바로 노르망디(Normandy) 상륙작전(일명 ‘오버로드 작전’, 1944. 6. 6)이었다.


● 역사적 배경

개전 초반 독일군 기갑부대의 빠른 진격으로 궁지에 몰렸던 영·불(英·佛) 연합군은 1940년 5월 말에 기적적으로 탈출(?케르크 철수작전)에 성공했다. 이때 이래로 영국군 수뇌부는 유럽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꿈꾸어 왔다. 하지만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기세가 오른 나치 독일군 앞에서 영국은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초반에는 ‘영국전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 본토 자체가 나치 침공 위협에 시달렸다. 이후 1942년 이래 간헐적으로 시도된 소규모 상륙작전들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나마 1942년 말경에 미군과 연합으로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에서 시도한 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위안을 주었다. 유럽 남부로부터 독일군을 압박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답보 상태에 있던 유럽 본토를 겨냥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 것은 소련의 끈질긴 요구였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침공으로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던 소련의 스탈린은 1942년 이래 줄기차게 이른바 ‘제2전선’ 형성을 서방 측에 요구해 왔다. 제2전선이란 영국군과 미군이 하루빨리 프랑스 해안으로 상륙, 유럽의 서쪽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도 ‘제1전선’으로 여긴 동부전선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박을 분산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유럽 대륙의 서쪽에서도 독일군을 세차게 공격해 달라는 스탈린의 요청은 비록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이란 명칭으로 1943년 5월에 영·미 연합군 수뇌부에서 합의가 도출되기는 했으나 제반 여건의 미성숙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루스벨트·처칠·스탈린 등 3거두가 회동한 테헤란 회담(1943. 12)에서 프랑스 해안지대에 대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실시가 최종 결정됐다. 남유럽에 대한 공격을 우선해야만 한다는 처칠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강경한 요구에 미국의 루스벨트가 동의하면서 결국 1944년 5월 중 결행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만일 이때 처칠의 주장대로 발칸반도 지역으로 상륙했더라면 전후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데 매우 유리했으리란 가정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테헤란 회담 이후 미군과 영국군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정점으로 합동사령부를 신설하고 다각적인 검토 끝에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정했다.

상륙부대는 영국 본토에서 수개월에 걸쳐 상륙 준비훈련을 실시했다. 무엇보다도 상륙작전에 소요되는 장비 및 보급물자의 확보와 집결이 여간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바로 해협 건너에서 독일군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는 상황에서 군사 보안을 유지하면서 선례조차 없는 대작전을 준비하기란 만만치가 않았다. 막바지까지 거듭된 우여곡절 끝에 1944년 6월 6일 새벽, 드디어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이 개시됐다.



● 전개 과정

일명 ‘D-데이(Deliverance Day)’로 불리는 이날에 대규모 원정대가 영국의 도버 해안을 출발해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총체적으로 상륙작전에는 약 5100척의 함정, 7500대의 항공기, 3500대의 폭격기, 차량 50만 대, 연인원 400만 명이 동원 및 참여했다. 당일 오전 6시30분경 약 40마일의 거리를 항해해온 1000여 척의 함정들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도착, 5개 상륙지점에 총 20만 명의 병력을 쏟아놓았다. 물론 독일군도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 6월 말에 프랑스 점령을 완료한 이래 독일군은 이른바 ‘대서양의 벽’을 구축해 프랑스의 해안지대를 거의 완벽하게 요새화해 놓고 있었다. 어떠한 규모의 상륙작전 시도도 불허할 태세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영국 본토에서 상대적으로 원거리에 있는 노르망디가 최종 상륙지점으로 결정됐을까? 실제로 연합군 수뇌부에서는 총 6개의 후보 지역을 놓고서 장기간에 걸쳐 분석작업을 했다. 이때 상륙작전이 전개될 해안의 수심 및 지세(地勢), 독일군 해안방어 능력 정도, 상륙 후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 상태 등이 중요한 고려요소로 작용했다. 다른 후보지들에 비해 영국 본토에서 멀다는 단점 이외에 다양한 고려요소를 그런대로 충족한 후보지는 노르망디가 유일했다. 무엇보다도 독일군의 방어태세가 비교적 약한 곳이라는 사실이 연합군 수뇌부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군의 상륙지점을 영국에서 가장 근접한 프랑스의 칼레로 판단하고 노르망디 지역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한 독일군으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이었다.

상륙부대는 크게 미군과 영국군을 주력으로 2개 군으로 편성됐다. 브래들리 장군이 지휘한 제1군 예하의 미 제5군단과 제7군단이 해안의 서쪽 지역을 담당하고, 뎀프시 장군 예하의 영 제1군단과 제30군단이 동쪽 지역을 맡았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리얼하게 재현되고 있듯이 오마하 해변을 비롯한 총 5개의 상륙지점을 향해 병사들을 가득 태운 상륙정이 다가가자 해안에서 독일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어렵사리 적의 저항을 뚫고서 해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서 연합군의 공세는 밀물처럼 이어졌다. 실제로 상륙이 개시된 지 10일이 지난 후 60만 명 이상의 연합군 병력이 그동안 도버해협 너머로 바라만 보고 있던 유럽 대륙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상륙 후 한 달이 지난 7월 초순경까지 200만 명의 인원, 17만 대의 차량, 그리고 약 60만 톤에 달하는 다양한 군수물자가 유럽 대륙으로 운송됐다.

한마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전형적인 입체전이었다. 항공기나 글라이더를 이용해 독일군 후방의 중요지점에 공수부대원들을 투입,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통신망을 제거했다. 이때 현지에서는 작전지대의 지리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이 간헐적 공격으로 독일군의 반격에 혼란을 일으켰다. 지상에서는 영국에서 예인된 임시 조립식 항만시설(일명 ‘멀베리’)의 설치로, 해저에서는 석유공급용 파이프라인의 부설로 노르망디 해안은 흡사 미국의 대도시를 방불케 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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