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김병재 교수의 군과 영화

하늘 위에서 전쟁을 읽은 남자 아군에겐 영웅, 적군에겐 악마

입력 2016. 01. 0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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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스나이퍼


255명 사살한 미 저격수 실화 바탕

초년시절 가정에서부터 애국심 키워

엔딩의 실제인물 장례식 장면 인상적

 

 



군은 영화의 단골 소재다. 적과 싸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함과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추구하는 영화가 닮아서다. 단 하나의 미션을 위해 여러 지역, 다양한 연령과 계층이 모인 군은 그 어느 조직보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다. 군의 가슴 벅찬 감동과 휴머니티, 확고한 신념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그린 영화들을 소개한다.

폐허가 된 황량한 중동의 시가지. 여기저기 건물의 벽돌이 깨져 있고 인적이 끊겼다. 그 한가운데를 미군 탱크와 험비(Humvee: 미군용 사륜구동 차량)가 위협적으로 들어온다. 그 양옆으로 미군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사주경계를 하며 집 수색을 한다. 이때 이슬람 전통 의상인 히잡을 두른 여자와 소년 하나가 나와 미군들을 향한다. 그녀가 무언가를 조심스레 소년에게 건넸다. 수류탄이다. 소년이 미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공중에서 총탄이 날아온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소년. 여자가 떨어진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는데 다시 날아와 정확히 가슴에 꽂히는 총탄.


순간 카메라가 하늘을 날 듯 위로 치솟으면 건너편 건물 옥상 창문 사이로 삐죽이 나와 있는 긴 총열. 그 총열 끝에 조준경이 달린 소총을 쥔 미군, 저격병이다. 그의 임무는 전쟁터에서 동료를 죽이려는 적군을 미리 제거하는 것. 적군에겐 저승사자요, 아군에겐 수호신이다. 그가 적군을 저격했기에 동료 전우들의 귀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전장에서 저격병은 아주 경제적인 전술행위다. 은폐·엄폐된 유리한 위치에서 총탄 한 발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덫을 놓는 사냥꾼처럼 상당 기간 기다리다 자신만의 판단으로 방아쇠를 당겨 상대의 목숨을 끊는다. 심적인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강한 애국심과 피나는 훈련뿐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2003년 이라크전에 참전해 적군에게는 악마였으나 아군에게는 영웅이었던 남자, 공식적으로 160명, 비공식적으로는 255명을 사살한 미 해군 네이비 실(NAVY SEALS)의 전설적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실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는 네 번 파병에 이라크에서 복무한 총 기간 1000일을 넘긴 베테랑 군인이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상당 기간 이라크 반군과 전쟁을 치렀는데 영화는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최고의 저격수 카일은 마치 하늘에 있는 신처럼 항상 적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보며 적군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조준경 안에 들어온 대상은 세상과 연(緣)을 끊은 '물체'일 뿐이다. 그 대상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고 종교·신념·가치관·세계관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의사가 도려내야 할 환자의 환부 같은 존재다. 카일은 스스로 "호흡을 지배하면 마음을 지배한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집중력을 높여 간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신의 영역이다. 그도 총을 거두고 지상에 내려오면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듯 나락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 역시 속세에서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식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카일은 애국심 하나로 똘똘 뭉친 남자다. 미 텍사스 카우보이 출신인 그는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나라인 미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했으며 미국을 위협하는 것들은 다 야만인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입대한 결정적인 계기는 9·11 테러 사건. 세상은 선과 악의 투쟁이고, 자신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 부친의 교육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영화는 애국심은 가정의 일상생활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웅변한다.



카일의 애국심은 유사시 전우애로 구체화된다. 카일은 전장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있는 일상에서도 "단연코 친구들을 해치려는 적만을 죽여 전우들을 보호했다. 날 괴롭히는 것은 여기에 있으면서 동료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강한 전우애를 나타낸다.



그에게 이라크인은 조국을 괴롭히는 테러집단일 뿐이다. 영화 초반 그는 적과 대결할 때 어떤 윤리적 동요도 없이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오직 악을 청소하려는 터미네이터 같은 캐릭터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아닌 것 같다는 아내의 눈물을 뒤로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명의 전우라도 더 살리기 위해 적지로 떠난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80세가 넘는 노장답게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사려 깊고,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국가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유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싸우는 국민은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영화의 거장이기도 한 이 감독이 영화 전반에 걸쳐 사실적으로 그려낸 시가전 장면과 영화 종반 모래태풍 속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등 그의 다른 전쟁영화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크리스 카일은 2013년 유명을 달리했는데 영화 엔딩 부분에 사용된 그의 실제 장례식 다큐멘터리 필름은 영화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한다. 영웅을 보내기 위해 성조기를 든 시민의 행렬은 위대해 보인다. 국가가, 국민이 영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미국 영화는 성조기로 시작해 성조기로 끝난다'는 미국 패권주의적인 색채와 상관없이 영화 내용과 잘 어울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같은 장면이 한국영화에 나오면 우리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부가 국가 정책 홍보용, 국수주의 운운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태극기의 등장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를 보면 유독 우리나라만 국기에 너무 무관심하거나 혹은 국기를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엔딩 화면 위로 흐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트럼펫 솔로곡 '장례식(The Funeral)'의 장엄하면서도 애잔한 선율은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큰 여운을 남긴다.

동국대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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