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제2차 세계대전 시크릿100선

리틀보이·팻맨 '핵펀치' 일본을 'KO' 시키다

김가영

입력 2015. 12. 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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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끝> 핵폭탄


미·영 함께 핵폭탄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실험 성공

8월 6일 히로시마 첫 투하…사흘 뒤 나가사키

15일 일본 항복 선언 2차 세계대전 막 내려

11만 명 사망했지만 더 큰 희생 막는 효과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에서 최초의 핵실험을 마치고 3주 후인 8월 6일 역사상 최초의 핵 공격을 실행했다. 코드명 '리틀보이'인 핵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한 것이다. 그리고 3일 후에는 코드명 '팻맨'인 핵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고 9월 2일 항복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게 됐다.



핵분열을 이용해 거대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은 1903년 영국 과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프레드릭 소디가 처음 발표했다. 그 뒤 별 진전이 없다가 2차 대전 발발과 더불어 이 무기의 위력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40년 영국은 독일을 탈출한 독일·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핵폭탄 연구에 착수했다. 또 핵폭탄 연구에 무관심했던 미국은 1941년 자국 과학자들이 '튜브 앨로이스'(영국의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 암호명)를 방문해 깊은 인상을 받은 후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이 개발 프로그램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그리고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영국 과학자들은 자연스레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독일도 핵 개발에 관심을 가졌는데 독일 과학자들은 노르웨이에서 중수(重水) 생성 연구를 시작했다. 중수를 개발하는 것이 핵분열 기술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 역시 핵폭탄을 개발하고 싶어 했는데 개발에 진전이 없자 핵심 기술을 빼내기 위해 미국에서 치열한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소련은 1949년까지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핵심 기술도 자체 개발보다 스파이들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



핵 개발을 둘러싸고 연합군은 독일을 철저히 견제했다. 독일의 기술 수준이 미·영에 비해 훨씬 뒤처진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미·영은 독일의 연구를 막기 위해 두 번의 공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공격은 1943년 1월 27일 밤 노르웨이 리우칸에 있는 중수공장 시설을 특공대가 습격해 대부분 시설과 기계들을 파괴한 것이었다. 독일은 이후 영국 공군의 폭격까지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남은 시설물과 중수를 독일 내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영국의 특수작전국(SOE)은 1944년 1월 20일 노르웨이 틴 호수에서 중수를 싣고 이동하던 페리에 폭탄을 설치해 침몰시켜 버렸다.



독일을 견제하는 가운데 미국의 주도 아래 공동으로 작업한 끝에 미·영은 2개의 핵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을 만들었다. 둘은 서로 다른 핵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팻맨이 리틀보이보다 좀 더 개선된 폭탄이었다.



지금도 일본에 핵폭탄을 사용한 것을 두고 도덕적 측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핵 공격으로 히로시마에서 약 7만 명이 사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약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민간인이어서다.



하지만 '만일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희생이 없었을까?'란 물음에 '없었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긴 어렵다. 사실 사상자 수로만 따지면 핵폭탄 투하 전 사용했던 소이탄에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1945년 3월 9일 시작된 도쿄 공습에서 1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고 10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됐다. 그 뒤 67개 일본 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소이탄은 다섯 달 동안 민간인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집을 잃은 사람도 약 500만 명이었다. 오키나와 한 곳에서만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 막바지 한 달 동안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다른 섬들에서도 막대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핵폭탄이 만든 대학살은 이전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규모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또 전쟁이 즉각 끝나지 않아 일본 본토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면 얼마나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을지 상상하기 힘든데 그런 민간인 희생자 수 예측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강제노동수용소에 있는 수십만 명의 아시아인들과 연합군 전쟁 포로들도 일본이 핵 공격의 충격 속에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면 모두 죽음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쟁에서 어떤 방법이 덜 나쁜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핵폭탄의 사용은 그로 인한 안타까운 희생과는 별개로 더 많은 희생자의 발생을 막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사진=책미래

김가영 기자 < k2ykim@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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