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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호바트 장군 조련한 '사막 쥐' 獨 롬멜 '사막 여우' 물다

입력 2015. 12. 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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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여우와 쥐의 사막전쟁


1940년대 초'사막 여우'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은

마치 여우가 사냥하듯 아프리카의 영국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1942년 8월부터 영국의 반격이 시작됐다.

아프리카 승리의 숨은 영웅은

7기갑사단을 조련한 '사막 쥐' 퍼쉬 호바트 장군,

후일 그가 개발한 특수 전차들은 노르망디 해안의 지뢰밭과 철조망을

거침없이 돌파하며 히틀러의 야망을 분쇄시켰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1940년대 초 사하라 사막은 캐럴 소리가 아닌 전차포 소리로 가득했다. 사막의 여우 롬멜이 쏘는 88구경 전차포를 사막 쥐 영국 전차가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막 쥐는 노르망디 해안 모래톱을 파고들었다. 히틀러의 유럽정복 욕심도 모래 위 누각처럼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 '사막 여우' 롬멜의 공격



바실 헨리 리델하트의 전략론 제3부 17장 히틀러의 쇠퇴 후반부는 지중해 전역을 다룬다. 1941년 초 북아프리카에서 무솔리니의 군대가 영국군에게 밀리자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1891~1944)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을 리비아로 보내 이탈리아를 돕도록 했다. 그는 수적으로 조금 밀린다 싶으면 일보 후퇴했다가 전열을 가다듬은 뒤 인정사정없이 반격했다. 독일군 특유의 군사적 전문성과 월등한 전투경험을 극대화시켰다.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은 뛰어난 기동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영국군을 패퇴시키며 또 다른 승리를 독일 국민에게 안겨 줬다. 그는 전차와 고사포를 개량한 88mm 포를 사막에 은폐해둔 뒤 영국군 전차를 유인해 격멸했다. 이로써 롬멜은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으며 영국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여우는 생태계 최고의 들쥐 사냥꾼으로 후각이 뛰어나며 낮에는 굴 속이나 숲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해질 무렵 활동을 시작한다. 예민하게 발달한 청각도 빼놓을 수 없다. 500m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남다른 후각과 청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점프력이다. 지상 1m 정도 뛰어올라 순간적으로 먹잇감을 낚아챈다. 여우가 꼬리를 휘저으며 점프해 사냥하는 모습은 롬멜을 닮았다.



서부전선은 영국과 대결하고 있던 프랑스 해안선에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까지 확대됐다. 리델하트는 1942년 5월 벌어진 리비아 북부해안 토브루크 전투를 간접접근전략의 걸작으로 평가했다. 이 전투에서 롬멜의 기갑부대는 이집트 국경을 향하는 것처럼 토브루크를 통과하다가 갑자기 토브루크를 방어하는 영국군 배후를 공격하는 기만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8월부터 영국군 사막 쥐가 사막 여우를 상대로 초기 패배를 뒤집고 반격에 나섰다.







■ 사막 쥐 호바트의 반격



사막 쥐는 영국군 7기갑사단을 상징하는 표지다. 2대 사단장 마이클 크리그의 부인이 카이로 동물원에서 날쥐를 보고 그린 그림이 사단 마크가 됐다. 이 사단을 영국군 최고 전차부대로 만든 장군이 퍼시 호바트 소장이었다. 그런데 호바트의 기갑부대 운용에 불만을 느낀 영국 중동 총사령관 워이블 장군은 그를 전역조치하라고 전쟁성에 요구했고, 전쟁성은 그를 퇴역시켰다. 그러자 리델하트는 일요신문(sunday pictorial) 기고를 통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 내용을 본 처칠은 1941년 호바트를 군에 복귀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둘러싼 편견 중 일정 부분에 대해 전혀 감흥이 없다. 그런 편견은 주로 성격이 강한 사람이나 특이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이니, 육군은 자신의 경력에 적대적인 비평이 없다는 것을 야단스레 떠벌리는 장교들만 임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처칠은 "오늘 행동하라(act today)"며 영웅을 알아봤고, 영웅은 이에 보답하듯 온갖 지혜를 모았다. 호바트는 79기갑사단을 맡았는데 이 사단은 일종의 전력화사단으로 해변과 야전의 장애물들을 처리하는 데 앞장섰다. 호바트는 견고한 셔먼 탱크나 영국의 처칠 탱크들을 다양한 형태로 개조했고 이들은 '호바트의 장난감'이라는 정겨운 별명을 얻었다. 바닷가로 몰고 갈 수 있도록 아래쪽을 부풀린 수륙양용 탱크, 거대한 금속 체인으로 모래를 마구 휘저어 적이 부설한 지뢰를 폭파시킬 수 있는 지뢰 제거 전차, 미 해병대가 태평양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화염방사 탱크 등이었는데 기갑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과였다. 그는 탱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사막 쥐, 노르망디 해변을 파고들다.



그의 사단은 가잘라와 알람 할파 전투 등을 통해 이탈리아 10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영국군은 엘 알라메인 전투(1942. 10∼11월)에서 역전의 기회를 잡고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독일군을 격퇴하기 시작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역사상 가장 빛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쳤다. 작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해변에 설치된 무수한 장애물도 그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전개된 연합군의 상륙전은 육해공군의 힘이 극적으로 융합된 연합작전의 결정체였다. 그런데 상륙작전을 펼치려면 해변과 야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제 해결을 위한 무기를 찾으려는 호바트의 끈질긴 탐색 덕분에 연합군의 상륙용 무기 체계가 향상됐고 적의 해안을 돌파하는 능력도 크게 증진됐다. 호바트의 장난감들은 노르망디 해안의 지뢰밭과 철조망을 거침없이 돌파할 수 있게 한 숨은 병기였다.



노르망디의 가장 왼쪽인 소드해안에 상륙하던 영국군 3사단은 지뢰밭과 해변 장애물을 만났다. 기존 탱크는 장애물 개척 장갑차로 모습을 바꿨다. 회전하는 거대한 못 같은 긴 팔을 장착했는데 이 팔은 모래 속으로 무거운 쇠사슬을 박아 넣어 지뢰를 폭파함으로써 보병부대가 안심하고 따를 수 있게 했다. 또한 길게 뻗어지는 평판을 장착한 장갑차는 소방차에 달린 긴 사다리처럼 푹 파인 길이나 장벽을 만났을 때 다리 역할을 했다. 영국군은 단 600명의 사상자만 내고 2만8000명이 무사히 상륙해 캉 마을 6km 이내까지 진격했다. 사막 쥐 퍼시 호바트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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