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업 해외취업 성공수기

봉사 정신 빛나는 '나이팅게일'

입력 2015. 12. 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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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김수완 에티오피아 KOICA


 

언어 장벽도 훌쩍~  전 세계 무대 도전!

 


 

 

 도전과 모험은 어릴 적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늘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결과물을 내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여 간호대학에 입학한 뒤 휴학 한 번 없이 졸업했고, 종합병원 응급병동 간호사로 3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응급병동의 생활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지금쯤 내게도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영어 문외한인 나의 첫 해외 취업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간호 일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한국이 아닌 다른 환경에 나를 던져 보고자 당시 한창 유행이던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시드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들고 온 퇴직금으로 당장 랭귀지스쿨부터 등록했다. 3개월 종일반 코스를 등록하여 전 세계 친구들과 영어를 배우고, 특별활동으로 호주 문화를 체험하고 여행을 다녔다. 하루 종일 영어만 쓰다 보니 시나브로 실력이 늘었다. 입시 영어 위주의 교육 아래 영어라고는 ‘헬로우, 땡큐, 익스큐즈미’ 수준이었으나, 3개월을 밤낮으로 공부하고 나니 지역 신문에 나온 일자리를 찾아볼 정도는 되었고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Nursing Home Assistant에 10군데 정도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중 한 곳에서 연락을 받아 면접을 보았다. 면접에서는 지원 동기, 내 성격의 장단점, 업무 능력 등을 물었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주고, 간호 경력도 있었기에 그다음 주부터 Assistant로 일하게 되었다. Nursing home은 우리나라로 치면 요양원 같은 곳으로 대개 할머니 할아버지 연령대의 분들이라 어려운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분들의 말벗이 되어 드리면서 다양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7개월간의 일을 마치고 떠날 때에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분들과 헤어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외래 간호사 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수원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사 활동을 하며 보건소와 연계하여 보건 증진 사업 활동을 도왔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져 갔고, 급기야 한국보다 상황이 더 어려운 곳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지구 반대편에서의 봉사 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KOICA에 지원해 50기 봉사 단원으로 선발되었다.
 
 ● 에티오피아에서의 2년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전 세계 커피 생산량 1위의 커피 대국답게 늘 갓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커피를 앞에 두고 드넓은 대지의 기운을 느끼며 평온한 하루를 여는 것을 상상하였는가? 커피만큼은 매번 신선한 생두를 로스팅하여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2년간 경험해야 할 에티오피아의 현실은 지구상에서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고 평균 수명이 가장 낮은, 빈곤 국가였다.
 현지에 도착해 두 달간의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후 2년간 봉사할 임지인 나자렛으로 떠났다. 에티오피아 제2의 도시 나자렛에 있는 나자렛 병원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데다 정부와 선진국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어 언제나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곳 응급실은 말로만 응급실이지 사람을 살릴 만한 구실을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고작 산소 탱크, 붕대, 소독 거즈……. 우리나라 보건소나 학교 보건실보다 못한수준이었다.

 초반 몇 개월은 외상 치료를 주로 담당하였다. 숨을 헐떡이는 환자가 오면 산소 주입밖에 할 수 없었고 두부 손상 환자가 오면 상처만 꿰맸다. 가장 힘든 순간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환자들을 마냥 지켜봐야만 할 때였다.

   에티오피아에선 모든 죽음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점은 그들에게 더 큰 질병을 안겨 주기도 한다. 나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휴일이나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하여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섰다. 곳곳의 교회 담장을 따라가면 옹기종기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간단하게는 상처 부위에 소독을 해주고 자비로 산 비타민과 구충제를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스무 명이 채 안 되던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해가 저물어도 줄 서 있는 환자들을 미처 다 돌보지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들에게 내 이름과 존재는 모두 ‘꼬레아’였다.
 

  약 6개월간 의료 장비 및 환경 개선, 직원 교육에 주력했다. 의료진들은 선진 의료기기를 접목하여 진료함으로써 더 정확한 진료를 하였고 환자는 나아진 의료 서비스에 만족도가 높아졌다. 또한 실습 나온 간호학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만든 심폐 소생술 매뉴얼을 교육했다. 이것은 따라하기 쉽고 일생생활에서도 활용도가 높아 큰 호응을 얻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봉사 활동은 봉사 그 이상이었다. 한국에서의 26년의 삶이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한 욕심 가득한 악바리 같은 삶이었다면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 내 손을 먼저 비워 놓아야 하는 삶이었다. 언어와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며 죽음과 맞서고 있을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나는 지금 미국 간호사 자격 시험과 한국어 교원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간호사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래 왔고 지금도, 미래에도 나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날까지 계속 쉬지 않고 도전할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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