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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입력 2015. 12.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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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


게르니카 폭격, 벽화 크기 대형 작품에 남겨

백열등 중심으로 전쟁의 참상 극적 묘사

충격적 표현…피카소 입체파 화풍 추구

 


 

 

제1차 세계대전을 대표할 만한 무기가 대포와 기관총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상징은 탱크와 비행기다. 철갑과 대포로 무장한 탱크가 지상의 왕자라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 도시까지 날아가 폭탄을 퍼붓고 사라지는 전폭기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일 공군에 의한 런던 등 주요 거점도시에 대한 폭격이 대표적 사례다. 수십일 동안 계속된 야간공습에 5만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주요 거점도시를 공격함으로써 상대의 전투능력과 의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전략폭격이었다. 말 그대로 모든 국민과 전 국토가 전쟁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총력전(total war)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이미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발생한 게르니카(Guernica) 폭격이다.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이날의 비극을 벽화 크기의 대형 작품 ‘게르니카’(1937)로 남기면서 유명해진 이 사건은 더 이상 민간지역도 전쟁의 화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스페인은 좌파 성향의 공화파 정부에 대해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내전이 시작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파 정부를 지원했지만 미온적이었다. 그에 비해 독일과 이탈리아 등 파시즘 정부는 프랑코 군대를 적극 지원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지원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왕당파와 가톨릭 세력 또한 프랑코 편이었다. 전세는 프랑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프랑코 군대가 북부 바스크 지역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의 전략거점도시 빌바오(Bilbao)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로 당시 인구는 7000명 수준이었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바스크의 자유를 상징하는 ‘게르니카의 나무(Gernikako Arbola)’가 있었고, 그로 인해 게르니카는 바스크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전략적으로 볼 때 게르니카는 공화파 군대가 후퇴하거나 결집할 수 있는 거점지역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또한 빌바오를 비롯한 다른 주요 거점 도시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장악할 경우 다른 거점도시를 고립시킬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는 총기제조공장과 함께 몇 개의 공화파 부대 지휘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이러한 상징적 의미와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감행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탈리아 공군의 초기 폭격 대상은 적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는 다리와 도로 등이었겠지만 당시 폭격의 정확도가 형편없었음을 감안할 때 그 주변의 민가 역시 폭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937년 4월 26일 일요일 오후 5시 게르니카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 속에서도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30㎞나 떨어진 전선에서 대포알이 날아올 가능성은 없었고, 프랑코 군대가 온다면 충분히 피란 갈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을 무참히 부수고 들어온 것은 공중폭격이었다. 25톤의 폭탄이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투하된 것이다. 빌바오로 이어지는 다리와 도로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가와 교회에도 폭탄이 쏟아졌다. 엄청난 폭음과 화염, 그리고 아비규환의 비명 소리에 순간 게르니카는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전이 발발한 상태에서 스페인 공화파 정부는 1937년에 개최될 파리 엑스포 스페인관에 전시할 작품을 피카소에게 의뢰한 상태였다. 정치적 소재를 다룬 적이 없는 피카소는 스페인의 일상을 다룬 작품을 구상했다. 그러나 5월 이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를 읽은 피카소는 처음 생각을 접고 게르니카의 비극을 보여줄 스케치를 시작하게 된다. 두 달간의 집중적인 작업을 통해 그해 7월 역사적인 명작 ‘게르니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피카소가 완성한 ‘게르니카’는 높이 349㎝에 길이 776㎝의 대작이다. 거의 벽화 크기로 제작된 이 작품은 위쪽 가운데 백열등을 중심으로 빛이 방사되면서 폭격의 참상을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열등은 고문실의 전등 같기도 하고 폭탄을 퍼붓는 비행기의 깜박이 불빛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 아래에는 온몸이 일그러진 채 절규하는 말이 몸을 비틀고 있다. 그 아래에는 온몸이 해체된 병사의 육신이 늘어져 있다. 부러진 칼을 쥐고 있지만 희미한 꽃조차 피우지 못할 상황이다. 왼쪽 가장자리로 펼쳐진 그의 손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흔적이 뚜렷하다.

 그림 왼쪽 죽은 아이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어미의 모습은 전쟁의 고통이 가장 약한 어린아이와 여성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해체된 황소의 육신은 가운데의 말과 이리저리 연결돼 온전한 육체조차 보전할 수 없는 극단적인 해체를 보여준다.

 그림 오른쪽에는 화염에 휩싸인 사람이 두 손을 길게 내뻗고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듯하다. 지옥 같은 공포에서도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말 오른쪽에서는 창을 밀치고 들어와 램프를 들이미는 행위를 통해 저항과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굵고 강한 팔과 램프를 쥔 견고한 손아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 아래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여인이 무릎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며 백열등을 주시하는 것도 그러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게르니카는 그런 점에서 전쟁의 고통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반전 그림이다. 그 어떤 작품도 폭격의 참상을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하지 못했다. 이러한 충격적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피카소가 추구했던 입체파(Cubism) 화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피카소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은 인간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분할하고 재조립함으로써 새로운 인물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입체파 작품은 인간의 육신을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전 그 어떤 작가들도 인간을 이렇게 해체시킨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해도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않지만 온전한 육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입체파에게 더 이상 일관된 윤곽을 갖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체의 기운은 이미 19세기 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인간의 구원은 사라지고 있었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들고 나왔을 때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19세기 말, 예술가와 작가들은 인간세계가 해체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해체와 파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현실화됐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극단적인 파괴와 해체를 본질로 하는 현대전의 진실을 보여준다. 총력전의 현실에서 그 어떤 이들도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문제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명한 진실이다. 가장 적극적 반전(反戰)은 어떤 공격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인 것이다.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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