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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의 귀재’ 나폴레옹, 리더의 위대함이 돋보이다

입력 2015. 12. 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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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프랑수아 제라르의‘아우스테를리츠전투’(1810)


전력 약화로 가장해 적 오판 유도 … 유인전술로 러시아군 대파

승리 후 차분한 나폴레옹의 모습 그려 … 황제로서 위대함 부각

 

 


 

 

   군부대에 가장 많이 걸려 있는 현판 글씨 가운데 하나가 ‘선승구전(先勝求戰)’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구절로 ‘이길 수 있는 요건을 다 갖춘 이후에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23전23승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상대인 적의 도움이 필요하다. 손자가 군형(軍形)편 첫머리에 ‘승리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적에게 있다(不可勝在己 可勝在敵)’라고 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투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가 말려들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전쟁사에서 위대한 승리의 하나로 꼽히는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1805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제정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나폴레옹이지만 여전히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공격을 위해 북부해안에 6개 군단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영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돌입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바다는 장악하고 있었지만, 21만에 달하는 정예 프랑스 육군에 대응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다시금 손을 잡은 이유다.

 프랑스 육군은 현대적 개념의 7개 군단으로 조직됐다. 각 군단은 독자적인 포병부대를 갖고 있었고 적어도 하루 이상 아무런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전투를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여기에 독자적인 포병전력을 갖춘 2만2000의 기병부대까지 겸비한 세계 최강의 보병전력을 자랑했다. 여기에 맞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 전력은 수적으로는 우위였지만 여전히 귀족주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력에 있어 열세였다.

 1805년 9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을 은밀히 260㎞ 전방의 라인강 변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6만의 오스트리아군이 울름(Ulm, 남부 독일 도시)으로 결집했지만, 프랑스군의 우회전술에 포위돼 전투도 하지 않고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쿠츠조프(Mikhail Kutuzov)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갖고 있는 거의 자살 수준의 방어계획에 반대하고 후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는 올무츠(Olmutz, 체코 동부 도시)까지 나폴레옹군을 끌어들인 뒤 격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폴레옹 입장에서 동유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급과 전선의 확대를 가져오기 때문에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가능한 한 라인강 변에서 승부를 가르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싸움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몹시 지쳐 있고 전력도 고갈된 것처럼 꾸몄다. 수차례에 걸쳐 휴전을 제의하고,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 후퇴함으로써 전력이 약화된 것으로 가장했다. 심지어 아우스테를리츠와 인근 중요 전략거점인 플라첸(Platzen) 고지에서 철수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무질서함을 연출해 적의 오판을 유도했다. 마지막에는 나폴레옹이 직접 나섰다. 그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러시아 대사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불안과 우유부단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동맹군 장군들은 즉각적인 공격을 지지했고 알렉산드르 1세도 동의했다. 쿠츠조프의 철수계획은 취소되고 러시아군이 아우스테를리츠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동맹군의 병력은 총 8만5000여 명으로 6만7000명의 프랑스군보다 많았고, 대포도 318문 대 157문으로 거의 두 배가 많았다. 얼핏 보아 아무리 나폴레옹이 전략의 귀재라 하더라도 한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나폴레옹의 유인전술은 전투에서 더욱 빛났다. 러시아군이 플라첸 고지를 중심으로 좌우로 부대를 배치하자, 나폴레옹은 중앙과 좌우에 균등하게 전력을 배분하지 않고 우익을 약하게 내버려 두었다. 적을 자신의 우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심산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우익을 공격하자 처음에는 밀리는 듯하다가 프랑스 후방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효과적으로 동맹군을 차단했다. 또 다른 나폴레옹 군대를 시간에 맞춰 진격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맹군이 프랑스 우익을 밀어내기 위해 추가전력을 집중하게 되자, 플라첸 고지를 지키는 전력이 약화됐다. 나폴레옹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 오전 8시30분, 그는 방담 장군과 생틸레르 장군 휘하의 정예 프랑스군 1만5000명을 투입했다.

나폴레옹은 지휘관들에게 “한 방에 쓸어버리고 전쟁을 끝내자”고 외쳤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2만8000명의 러시아군과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몇 차례 공방이 전개됐지만, 러시아군은 정예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프랑스 대포에서 날아온 산포탄이 러시아군 머리 위에서 작렬했다. 동맹군이 대거 투입됐지만, 결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높이 14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언덕이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이라는 전설적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일단 플라첸 고지가 점령당하고 나자 남쪽과 북쪽 전선에서도 프랑스군이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몇 개의 전략거점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결국 동맹군은 무질서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체 동맹군의 40%가 넘는 3만6000여 명의 사상자나 포로가 발생한 데 비해 프랑스군의 피해는 9000명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이 빼앗은 동맹군의 군단깃발은 모두 45개로 나폴레옹 전쟁(1805~1815) 과정에서 그가 얻은 가장 값진 승리였다.

 프랑스 낭만파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1770~1837)가 그린 이 그림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맹군의 군단깃발을 나폴레옹에게 전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다소 복잡한 구성이지만 전투의 격렬함을 말해주는 하단 부분과 나폴레옹의 승리를 보여주는 상단 부분이 결합돼 있다. 차분한 모습의 나폴레옹에게서 어떤 기쁨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의당 이겨야 할 전투에서 이겼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황제로서의 위엄과 위대함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1810년 나폴레옹이 여전히 황제로서 권능을 누리고 있던 시기에 제작됐다. 베르사유 궁전의 천장 그림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길이 10m, 높이 5m의 대작이다. 로마 황제를 닮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욕망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엄청난 재물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협정을 통해 북부 이탈리아를 비롯한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4000만 프랑의 전쟁보상금도 약속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1804년 재정 파탄에 직면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고, 그후 10년간 나폴레옹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전략의 귀재로 불리는 나폴레옹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사건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적의 전력과 전술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의 유인에 말려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투였다. 러시아 지휘관 쿠츠조프의 생각대로 러시아군이 동유럽 깊숙이 후퇴했다면 결과를 단언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는 상대의 도움이 없다면 결정적 승리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그런 점에서 ‘역사적’ 전투였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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