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그 後

그가 죽던 날…내 가슴도 구멍이 뚫렸다

이주형

입력 2015. 06. 2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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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끝> 제2연평해전 당시 박동혁 병장 치료한 이봉기 강원의대 교수


부상자 찾아 움직이는 의무병 전투 때 위험

박 병장 몸에 파편 100여 개…순간 ‘울컥’

의료진 혼신의 노력 불구 84일 만에 운명

 

수기로 당시 상황 알려…많은 사람들 감동

제2연평해전 통해 군과 안보 중요성 절감 

 

 


 

 



 

  지난 1일 밤 서울 코엑스 한 대형극장의 영화 시사회장. 영화가 진행될수록 장내는 숙연해졌다. 특히 30여 분에 이르는 교전 장면이 나올 때는 울음바다가 됐다. 영화의 제목은 연평해전. 관객은 전사 장병의 유족들과 참전자, 그리고 관계자들이었다. 강원의대 이봉기(사진) 심장내과 교수도 그중 한 명. 그는 당시 국군수도병원에서 고 박동혁 병장을 치료한 군의관이었다.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의관이 된 이래 목격한 환자 중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달고 있던 환자.’

 제2연평해전이 있던 다음날인 30일, 이 교수가 본 박 병장의 첫인상은 그랬다.

 “처음에는 여러 부상병 중 한 명으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울컥한 겁니다. 전투병은 당연히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사격하게 마련이지만 의무병은 그게 없어요.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박 병장 몸에서 부상자 중 가장 많은 100여 개가 넘는 파편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교수를 비롯한 모든 군의관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를 느끼며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각오였다.

 덕분일까. 박 병장은 조금씩 호전돼 갔다. 그런데 왼쪽 다리 대퇴부 동맥에 박힌 파편이 문제였다. 썩어 문드러져 결국은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지만, 뜻밖의 장애는 박 병장으로 하여금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했다. 정신과 군의관들도 투입, 심리치료도 병행한 끝에 박 병장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갈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한시름 놓았던 순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 달도 안돼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 보니 뇌에 세균이 감염됐다. 민간에서 좋다는 항생제도 있는 대로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사투를 벌인 지 84일 만이었다.

 “‘구멍이 뻥 뚫렸다고 하죠’. 딱 그 느낌이었어요. 모두 얼마나 허탈해했는지. 그러면서 자책감이라고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뭐했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때 이것도 했어야 했는데’. 의료진 모두 아마 조금씩은 트라우마가 생겼을 겁니다. 그리고 불만들도 있었죠. 국가를 위해 전사한 장병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

 2003년 이 교수는 당시의 일을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제목으로 의료전문지 ‘청년의사’가 주최한 수필 공모전에 응모했다. 장려상을 받은 이 수기는 ‘서해교전, 어느 군의관의 소고(小考)’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졌고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줬다. 그 유진이가 벌써 중학교 1학년이 됐다. 한편,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행사는 해군2함대사령부 주관의 서해교전 추모식으로 진행되다가 2008년 제2연평해전이라는 이름과 함께 국가보훈처 주관의 국가행사로 격상됐다. 유족들의 말 못하던 울분과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 풀린 셈이다.

 그리고 이 교수는 지난 1일 시사회를 통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13년 지나서 만났는데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기뻤습니다. 이철규 상사는 골반 쪽을 워낙 많이 다쳐 아이 갖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었는데 다행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더라고요. 손을 심하게 다쳤던 권기형 상병은 트라우마에 시달려 직장도 못 다니고 하다가 이번에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합니다. 이희완 소령도 결혼해 잘 살고 있고, 다른 유족분들도 예전보다 얼굴들이 좋아지셨더군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인지, 환경이 나아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이 교수는 연평교전을 계기로 군과 안보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6월이면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결사항전을 하는 젊은 영웅들의 꿈을 꾼다면서 하나의 소망을 밝혔다.

 “예전에 미국 연수 갔을 때의 일입니다.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앞에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군인이 입장하시니 경의를 표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기내방송이 나온 겁니다. 제복을 입었는데 장교도 아니고 병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인사하고, 어떤 분들은 일어나는 분도 있고.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소중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군인입니다. 군인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국민들이 성원해 주고 알아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설령 보상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더욱 열심히 근무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겁니다. 나아가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아졌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남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다. 제2연평해전 13주기가 되는 29일, 그날을 앞두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여섯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새삼 떠오른다.

 

 

  [제2연평해전]

 

   한반도가 월드컵 열풍에 빠져 있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다.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차단기동을 하던 참수리-357정을 함포로 기습 공격하면서 30분 남짓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 경비정은 반파됐고 사상자를 30여 명 낸 것으로 알려졌다. 제2연평해전을 계기로 우리 군의 교전 수칙은 적극적 응전 개념으로 수정됐다. 해군은 연평해전 여섯 용사를 기리기 위해 유도탄 고속함 1~6번 함을 진수하면서 차례대로 윤영하함·한상국함·조천형함·황도현함·서후원함·박동혁함으로 명명했다.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됐던 ‘그 후’가 오늘자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애독자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이주형 기자 < jatak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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