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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최고·최다 ‘최’ 하나만 잡으면 당신은 ‘성공인’

입력 2015. 06. 0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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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 상 원 두산중공업 상무


울릉도 소년, 두산 생산직 임원 첫 주인공으로 우뚝

많은 시행착오 거쳐 발전설비 주요기술 국산화 성공

구조조정 위기를 품질개선·제안활동 기회로 삼기도

“위기는 곧 기회 … 긍정적 마인드·실천력이 중요해”

 

 

 

 

 

   바다 너머 미지의 세계로!

 지난해 6월. 울릉도에는 ‘이상원! 두산중공업 상무 승진’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두산중공업 이상원(56) 상무는 보통(?) 임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두산에서 시행한 생산직 임원의 첫 주인공이다. 서류를 결재하는 임원이 아니라 기계를 만지는 임원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다.

 이상원이 울릉도를 떠날 때만 해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릉도의 조그만 어촌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도전을 택했다.

 “당시 저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울릉도에 남아 배를 타며 어부가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육지로 나가 돈을 버는 것이었죠. 저는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너머의 육지로 무작정 나갔습니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선 육지생활에 그는 금세 지쳤다.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도 다 떨어졌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대구의 삼촌에게 도움을 청했다. 삼촌은 1년 과정의 직업훈련소를 추천해줬다. 거기서 이상원은 처음으로 기계를 만지며 꿈을 키웠다. 그곳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상원은 경남 창원에 있는 두산중공업 공장에 취직했다.



   당신은 회사 출입금지요!

 발전설비 공장의 기능공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이상원은 어느 날 게시판에 붙은 ‘미국 연수자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울릉도를 떠나며 배를 탈 때의 그 두근거림이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미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발전소 터빈 블레이드(엔진 날개)를 국내에서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생산 공장에 연수를 보내 제작기술의 비법을 알아올 기술자를 모집했던 것이다. 이상원은 영어를 못했지만,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피땀 흘리며 몸으로 체득한, 기계에 대한 전문성은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는 공장장을 찾아갔다.

 “공장장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생산기술을 배워 와서 터빈 블레이드를 제 손으로 꼭 만들겠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이미 영어가 능숙한 직원을 연수자로 점찍어 두었던 공장장은 이상원의 진정성에 마음을 돌렸다. 마침내 연수 대상자로 선발된 이상원은 난생처음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가볍게 창공으로 이륙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국산화 기술을 알기 전에는 한국에 올 생각 하지 마라!”는 공장장의 말이 귓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러나 미국 회사는 터빈 블레이드 생산 장비의 가동방법만 알려주고 제작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 회사에서도 중요한 기밀이었다. 상원은 생산 장비의 가동을 배우는 척하며 옆 라인에서 미국 기술자들이 터빈 블레이드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어깨너머로 살펴봤다. 이를 눈치챈 미국 기술자들은 몸을 돌려 상원이 볼 수 없도록 막았다. 낭패였다. 상원은 전략을 세웠다.

 “그 회사는 점심시간이 좀 길었습니다. 저는 그때가 기회라고 생각했죠.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자리를 비우면 직접 생산라인에 가서 터빈 블레이드 생산방법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저를 안내하는 직원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공장에 홀로 남았습니다.”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상원은 터빈 블레이드 생산 현장에서 수첩을 꺼내 필요한 정보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 제작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장비를 가동하던 중 ‘꽝!’ 하고 큰 굉음이 들리면서 기계가 멈췄다. 터빈 블레이드를 고정하던 회전축이 풀리면서 생산 장비와 크게 충돌했던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미국 기술자들이 공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당장 우리 회사에서 나가시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출입금지입니다.”



   신혼의 달콤함을 뒤로하고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우러 간 회사에서 출입금지를 당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회사를 관둬야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잔뜩 기대하고 있던 공장 사람들 생각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결혼을 한 이상원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다행히 미국 회사는 터빈 블레이드 생산 장비를 계속 납품해 주었다. 하지만 터빈 블레이드 제작기술이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이상원은 신혼의 달콤함을 뒤로하고 무수히 많은 밤을 새우며 기술개발에 들어갔다. 제작 프로그램 변경과 가공 방법의 수정 등 끊임없는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마침내 2년 만에 터빈 블레이드 국산화에 성공했다. 그리고 터빈 블레이드의 핵심 부품인 버킷까지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터빈 블레이드 버킷 1개는 고급 자동차 1대 가격과 맞먹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원자력발전소 1호기에 약 1만 개의 버킷이 소요되므로 수입대체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1997년 국가 외환위기가 터졌다. 연일 뉴스에서는 기업들의 부도와 인력감축 소식을 전했다. 이상원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 구조조정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죠. 제안을 통해 생산비 절감을 이루고 신제품을 개발해서 기업 경쟁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또다시 동료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지 않으니까요.”

 우선 그는 ‘30초 이내 물건 찾기 운동’을 제안해 가시적으로 공장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직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구와 부속함을 서로 개방하고 품목별로 정리해 누구나 쉽게 찾아 사용하도록 했다. 절약된 시간은 생산력과 직결됐다. 그리고 경쟁력을 상실한 설비의 매각과 그에 따른 공장 재배치를 제안했다. 직원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상원은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위기를 품질개선과 제안 활동의 기회로 삼았다. 이를 통해 그는 원자력발전소의 핵심인 터빈 블레이드 부품 50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고 기능공에서 기업의 별이라는 상무로 승진했다. 그는 말한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지요. 그리고 거침없이 들이대는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이후 최초, 최다, 최고 중의 하나만 이룬다면 당신은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될 겁니다.”

김 정 진 상사·교육학 박사 육군1방공여단 무기정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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