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고구려부터 활 잘 쏘는 민족이란 뜻 ‘동이족’이라 지칭 기병 138㎝·보병 152㎝로 무장

입력 2015. 05. 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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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고대 무기체계(Ⅲ) - 활


고구려 시조 주몽,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삼국사기 기록

나무·뿔·힘줄·아교·명주실·옻칠 등 6가지 재료로 제작

 


 

 

 중국의 한족(漢族)은 스스로를 ‘중화’라 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여겼으며, 동서남북 사방의 이민족에 대해서는 각각 “동이·서융·남만·북적”이라 해 자신들보다 열등한 족속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조상을 지칭하는 동이(東夷)라는 표현에서 이(夷)는 ‘큰 활’을 합쳐 놓은 글자다(夷=大+弓). 이는 중국인들이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동이족은 활을 잘 다루는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겠는데, ‘후한서’에는 고구려인이 생산해 사용하는 맥궁(貊弓)을 ‘좋은 활(好弓)’이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 건국 신화에는 고구려인이 활을 중시했고, 또 잘 활용했음을 암시하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시조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그는 일곱 살 무렵부터 남달리 무예가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주몽’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주례’ 고공기에 의하면, 활은 나무, 뿔, 힘줄, 아교, 명주실과 옻칠 등의 여섯 가지 재료를 사용해 만들었다. 활대(간: 幹)의 재료로는 유연성과 탄성이 있는 산뽕나무, 참죽나무, 귤나무, 모과나무, 가시나무 및 대나무 등의 순서로 선호됐다. 활대의 중앙에는 벚나무 껍질을 감아 손으로 쥐는 자리를 만들었다.

 뿔(角)은 활대 가장자리의 활줄(현: 弦)을 연결하는 부분에 사용하는 재료인데, 소의 뿔 혹은 양의 뿔 중에서 청백색을 띠는 부드러운 것이 선호됐다. 힘줄(筋)은 활대(幹)의 바깥쪽에 덧대어 탄성을 높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데, 폭이 좁고 길이는 긴 것으로서 하나로 연결된 윤택한 힘줄이 선호됐다. 대체로 소의 등에서 나오는 힘줄을 건조시킨 후 다시 물에 적셔 줄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아교(膠)는 활대와 힘줄을 접착하고, 활대의 양쪽 끝, 활줄을 연결하는 곳에 뿔을 접착해 연결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동물성 아교로는 소·사슴·말·쥐 등의 껍질이나 뼈를 녹여서 사용했고, 물고기의 내장을 녹여 사용하기도 했다.

 명주실(絲)은 활줄로 사용됐다. 보통 20~25 가닥의 명주실을 꼬아 실이 제각각 놀지 않도록 만들어 사용했는데, 양끝은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어 활대 끝 부분인 활고자(미: ?)에 연결해 사용했다. 명주실을 구하기 힘들었던 북방 민족은 명주실 대신 소의 힘줄을 사용했다. 힘줄로 만든 활줄은 수분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명주실로 만든 활줄은 수분에 약했기 때문에 방수를 위해 납(蠟: 밀초)을 발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옻칠(漆)은 활대에 발라 나무와 힘줄의 접착 및 활대와 활고자의 접착을 강화시키고 비나 눈으로부터 활대의 내부를 보호하는 방수 도료로 사용됐다.

 활의 크기는 6척6촌(152㎝), 6척3촌(145㎝) 및 6척(138㎝)의 세 종류가 있었는데, 기병은 주로 길이가 짧은 활을 사용했고, 보병은 상대적으로 긴 활을 사용했다.

 다음은 고대 전투 사례에서 활이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자.

 신라 진평왕 46년(624)에 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해 속함성·기잠성·혈책성 등 3성을 함락하고, 그 기세를 타서 앵잠성과 기현성을 공격했다. 이때 신라군의 방어책임자였던 눌최(訥催)는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이 전투 중에 눌최를 호위하던 그의 시종(奴)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백제군을 향해 활을 당겨 눌최의 앞에서 여러 명의 적들을 죽이자 백제군이 두려워해 전진하지 못했다. 백제군 한 명이 뒤에서 접근해 도끼로 눌최와 종을 마침내 죽이고 성을 함락했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 황산전투에 참전한 관창(官昌)을 묘사하면서 “16세에 화랑이 된 관창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자(能騎馬彎弓)였는데, 어느 사람이 국왕에게 천거해 백제 공격에 참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원년(661) 평양 부근에 접근한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작전에 투입된 열기(裂起)와 구근(仇近) 등 15인의 특수임무부대가 적진을 뚫고 전진할 때, 그들은 “활과 칼을 가지고 말에 탄 채 달려갔는데(持弓劍走馬), 고구려군이 바라만 볼 뿐 이를 막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15년(675) 당의 조종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말갈족이 신라의 북쪽 아달성을 공격했다. 성 안으로 적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소나(素那)는 적을 맞아 싸웠는데, 적이 소나의 위용을 두려워해 접근하지 못하고 활만 쏘았다. 소나도 이에 화살을 쏘았는데, “마치 벌 떼가 날아가는 것 같이 소나가 쏜 화살이 날아갔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의 몸에 화살이 박힌 것이 마치 고슴도치와 같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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