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이종무 장군의 척왜공적(斥倭功績)
적선 129척 빼앗고 중국인 포함 포로 구출
고려 우왕과 조선 태조 때도 왜구 잇단 격퇴
66세에 세상 떠나자 세종 사흘간 조회 중단
1995년 국산 잠수함 주인공돼 바다 수호
이종무(李從茂·1360~1425)는 조선 초기의 무신이다. 이을진(李乙珍)의 아들로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했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했으며 세종 때 대마도(쓰시마 섬)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가 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됐다. 시호는 양후(襄厚)다.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돼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복했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해 1419년 음력 6월 12일 주원방포(周原防浦·현 추봉도)를 기착지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에서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고, 당시 총 227척의 규모로 출정했으며, 앞서 6월 17일 출발했으나 바람(마파람) 때문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월 20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마도에 도착,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했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했다.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왜구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의 중신들이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9일 죄를 갚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를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당한다. 김훈과 노이는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했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해 이종무와 김훈·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했으나 세종이 거부했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년 6월 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향해 출발,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에 이르렀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사흘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했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난 이종무는 우왕 때 벼슬을 시작해 창왕·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 명의 왕을 섬겼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정종·태종·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 왕을 모신 무인으로 전후 왕조 여덟 분의 왕을 섬긴 인물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해 안정된 대왜관계를 마련했다.
1995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국산 잠수함 1200톤급 이종무함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됐다. 수중 최고 속도는 22KN이며, 어뢰와 기뢰를 장착하고 2개월 이상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노래방에만 가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꼭 부르게 되고, 이때마다 이종무 장군의 호국정신이 돋보인다.
박희 선문대 교수·문학박사(한국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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