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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살리겠다는 집념진흙에서 재료 추출…과학 국방의 시초

입력 2015. 05. 1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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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화약 발명가 최무선


중국 불꽃놀이 보고 화약무기제작에 관심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 염초 추출법 배워

‘화약수련법’ 등 저술… 당시 평가는 저조  

아들 최해산 등이 태종때 무기로 발전시켜


 최무선(崔茂宣·1325~1395)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 과학자, 화약 발명가다. 본관은 영주(永州: 경북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화약 무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어릴 적 왕을 위해 일하던 부친과 궁전에 있을 때 몽골인과 중국인이 만든 불꽃놀이를 보게 된다. 이 일은 나중에 그가 화약의 재료를 고려로 들이는 일에 많은 동기부여가 된다.

 최무선은 중국 상인으로부터 재료를 얻어 화약을 제조해 한국의 화약 국내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한반도 근해를 습격한 왜구를 쫓는 데에도 화약을 이용해 다양한 무기를 발명했다.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일찍부터 화약제조법 연구에 골몰했다. 화약을 만드는 재료인 초석(硝石)·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염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재료의 견본과 기술을 밀수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화약의 중요한 재료였던 황, 분탄 혹은 양질의 석탄과 염초(焰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그러나 최무선에게 초석과 광물상태의 염초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고, 그런 정제되지 않은 원료로부터 어떻게 화약을 준비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최무선은 화약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혼자 관계 서적을 독파하는 한편 틈틈이 원나라 말을 익혔다.

 신라시대부터 화약과 화포(火砲)가 전래돼 있었으나 화약 제조에 필요한 염초를 얻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에 염초를 의존했다. 화약의 주요 재료 중 하나인 염초는 진토(塵土)에서 채취했는데 원나라나 명나라는 그 방법을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이 기술을 아는 인물이 없었다.

 그는 관직도 버리고 세인들의 외면과 비웃음 속에서 연구에만 몰두했다.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쳤지만 실패의 연속으로 최무선은 연구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다 화약을 잘 안다는 부유한 중국 상인 이원(李元)에 대해 듣게 된다. 진흙에서 염초를 채취하는 기술을 원나라로부터 배우기 위해 중국과 해외 상인들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에 가서 원나라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그 방법을 묻던 중, 원나라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을 만나 집으로 데려와 염초 자취법을 배우게 된다.

 최무선은 이원을 후하게 대접하는 한편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을 보여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흙에서 염초를 추출하는 방법을 이원에게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원이 원나라로 돌아간 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직접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를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화약의 제조법과 염초의 채취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 등의 저술을 남겼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유실됐다.

 그가 죽은 후, 조선 태조는 그에게 부총리(원수) 격의 명예를 안겨준다.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은 태조 때 군기시소감(軍器寺少監)으로 등용됐고, 후일 태종 때 아버지의 기술을 계승한 최해산 등이 조정의 요직에 중용되면서 다시 화기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최무선은 많은 문하생을 남겼으나 화약 개발에 대한 평가는 저조했고, 당대에는 아무도 그의 염초 추출 기법 등에 대한 노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최무선의 이 과학 국방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잘 계승했더라면 오늘 우리의 자주국방 시기는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박희 선문대 교수·문학박사(한국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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