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소총만으로 ‘6일 전투’ 지휘北 도하 끈질기게 막았다

입력 2015. 03. 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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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상재(兪象在) 소령과 한강방어선전투


1950628미아리고개 통과

국군, 서울 포기하고 한강교 폭파

공격 거세던 대방역 일대서

한강방어선 수호 과 치열한 공방

73일 새벽 적 포화에 전사

6일간의 한강방어전투 성공 한몫

 

 서울 여의도와 그 일대의 한강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8년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되면서였다. 1950년대 한강의 모습은 현재와 많이 달랐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 고(故) 유상재(兪象在) 소령이 방어전투를 수행했던 대방역 구간의 샛강은 거의 개울과 같은 수준이었다.


 

 


 

 





 ●1950년 서울 포기와 한강방어선을 최초로 논의한 군사경력자회의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강을 방어선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못했다. 전쟁지도부에서 한강방어선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6월 26일이었다. 오전 10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에서 열린 ‘군사경력자회의’에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상황은 동두천과 포천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면서 의정부가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날 회의에는 각군 총참모장, 김홍일 참모학교장, 송호성 전 경비대총사령관, 유동열 전 통위부장, 이범석 전 국방부 장관, 이청천 전 광복군사령관, 김석원 전 제1사단장 등이 참석했다. 회의를 주관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국군이 의정부에서 반격을 가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홍일 참모학교장은 의정부 북쪽에서 반격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한강 이남에서 방어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김석원·이범석이 동조했다. 신 장관과 채 총장은 서울 고수론을 굽히지 않았다. 회의는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6월 28일 새벽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통과하자 채병덕 총장도 서울을 포기하면서 한강교 폭파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한강은 서울 부근의 강폭이 700~1500m, 수심 평균이 3m로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유용한 방어선이었다. 당시 한강에는 모두 5개의 교량이 있었다. 인도교인 한강대교와 광진교, 그리고 경인 상·하행선 철교, 경부 복선 철교였다. 한강교를 폭파할 때 한강대교와 광진교, 경인 하행선 철교는 절단됐다. 그러나 경부 복선 철교와 경인 상행선 철교는 절단되지 않고 부분 폭파되는 데 그쳤다.

 6월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대교가 폭파되기 직전 한강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한 채병덕 총참모장은 김홍일 참모학교장을 시흥지구방어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서울 북쪽에서 분산된 채 나룻배 또는 수영으로 철수해오는 병력을 재편성해 한강방어선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유상재 소령의 입대와 활약

 고(故) 유상재 소령은 1923년 2월 10일 경기 파주시 파주읍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식민지 시절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성장한 유상재는 1948년 8월 9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7기로 입교했다. 그해 12월 21일 육군소위로 임관한 그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주둔하고 있던 제1연대 예하 제3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유 소위는 1949년 1월 22일 제1연대가 의정부로 이동해 동두천 북방의 38도선 경계근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제7사단에 소속됐다. 유상재 소위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38도선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제7사단은 사령부를 의정부시에 두고 동두천 축선에 제1연대, 포천 축선에 제9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때 유상재 소위는 중위로 진급해 제3대대 참모장교로 근무 중이었으며, 제3대대는 의정부에 집결해 연대의 예비대대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은 격렬했다. 그들은 동두천 축선에서 제4사단과 13대의 T-34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감행했다. 오전 9시쯤 유상재 중위가 소속된 제3대대가 봉암리로 역습을 시작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들은 창동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대방역 부근의 한강방어선전투

 유상재 중위와 제3대대는 동두천과 창동에서 부대 건제(建制)를 유지한 채 철수했다.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가 폭파된 이후 한강 변에 도착한 그들은 나룻배를 구해 한강을 건넜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전방에서 철수해오는 부대들을 혼성부대로 편성해 한강 남쪽의 방어선을 점령하도록 했다. 노량진에 도착한 제1연대의 예하부대 중 건제를 갖추고 있는 부대는 제3대대뿐이었다.

 제3대대를 기간병력으로 제1연대 혼성대대가 편성됐다. 유상재 중위와 김기영 중위가 중대장으로 임명됐다. 책임구역은 대방역~신길역 구간이었다. 당시 여의도 남쪽 동작구~영등포구 구간은 지상으로 거의 연결돼 있었다. 그때 북한군은 여의도를 선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의도와 거의 연결돼 있던 대방역 일대의 구간은 북한군의 공격이 치열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6월 30일부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차를 도하시키기 위해 경부 복선 철교를 보수하는 한편 도보부대를 여의도에 투입해 노량진역~대방역~신길역 구간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다만 여의도에는 전차가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상재 중위는 소총만으로 무장된 혼성중대를 진두에서 지휘하면서 북한군의 도하를 매번 저지했다. 당시 국군은 박격포탄 등 공용화기 탄약은 물론 소총 탄약의 보급조차 열악한 상황이었다.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지만 유상재 중위와 장병은 투지와 조국수호의 사명 의식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엔군의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한강철교 보수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강철교 보수작업이 지연되면서 북한군 전차는 한동안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전차가 한강을 도하할 때까지 보병부대와 포격만으로 국군의 한강방어선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7월 3일 새벽, 북한군의 전차가 한강철교를 넘으면서 더 이상 한강방어선을 지켜낼 수가 없었다. 그때 유상재 중위가 적의 포화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러나 그의 투혼은 6일간의 한강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이바지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유상재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소령 계급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7-1-187)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제1권 720·729쪽)에 그의 활약과 전사 상황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그에게 무공훈장조차도 수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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