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태극기를 인공기로 바꾸려 했던 소련 앞잡이들
1947년 김일성대학 총장 김두봉, 소련에 태극기 국기 채택 제안
당시 북 정치 총괄 레베데프 소장 “황당무계한 말 마시오” 힐책
몇 달 후 평양 주둔 소련군 사령부 통해 인공기 도안 건네져
●인공기는 소련의 하사품
1993년 9월 26일 동아일보는 ‘북한 인공기, 구소련이 만들었다’라는 제목으로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러시아 동포 박일 교수의 증언을 소개했다. 광복 이후 북한 공산화를 위해 소련에서 북한으로 파견됐던 그는 김일성대학(1946년 10월 1일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설립) 부총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박 교수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의하고, 당시 북한 정치를 총괄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2) 소장의 통역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증언한 인공기 제작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충격적이다.
1947년 여름, 레베데프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의 사무실에 가보니, 김일성대학 총장 김두봉이 와있더라는 것이다. 레베데프는 머잖아 북한에 나라를 세우려면 국기가 필요할 텐데 김 총장의 의견을 듣고 싶으니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두봉이 태극기에 우주의 원리 등 역학적 의미가 담겼고, 한국의 전통이 반영됐으니 국기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자, 레베데프는 ‘우룬도르’(동아일보는 ‘우룬다’로 표기), 즉 ‘황당무계한 말 마시오’라고 힐책했다는 것이다. 몇 달 후 평양 주둔 소련 제25군 사령부를 통해 북한에 인공기 도안이 건네졌으며, 박일 교수가 북한인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줬다는 증언이다.
참고로 김두봉이 인공기 제작에 깊이 관여했으며, 1948년 초 태극기 폐지 이유들을 설명하는 중에 ‘태극기가 주역에 바탕을 두어 비과학적’이라고 폄하한 것을 보면, 박일 교수의 증언이 사실에 가깝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6·25전쟁은 태극기와 민족에 대한 배신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과 중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무장한 북한 괴뢰군이 38선을 넘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야욕을 누차 미국 정부에 경고하고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이 귀를 막고 오히려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지 채 1년도 안 돼서다.
미국 정부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대해서 얼마나 무감각했는지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 있다. 6·25전쟁 발발 이틀 후부터 6개월간 전선을 누볐던 전설적인 종군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의 비망록이다.
“북한군의 공격에 관한 첫 보고를 받은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당직 장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 보고를 위해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깨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격자들의 진격은 몇 시간도 안 돼 우리에게 그들의 힘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했다. 동북아시아 최후의 비공산주의 전초기지인 한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은 피보호국인 한국에 대한 전투지원을 할 것이냐,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양보할 것이냐를 즉시 결정해야만 했다.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끔찍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 주고 있다.” (‘자유를 위한 희생’, 13쪽)
6·25전쟁이 발발하고 6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국민을 버리고 먼저 피란을 갔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무능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제기될 만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변명도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변명을 듣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 중 연설문집을 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전혀 찾을 수 없다. 6·25전쟁 기간 중에는 한 번쯤 등장할 법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이승만은 한반도 적화를 노렸던 스탈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을 적으로 보았지, 그들의 꼭두각시이자 민족을 배신한 애송이 김일성은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둘째, 이승만은 피란 중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태극기가 아니라,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목숨과 태극기를 우선 지키고, 한반도에 태극기를 휘날릴 날을 기약하며 화급히 서울을 빠져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발발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5일, 외신기자들 앞에서 벌인 이승만의 태극기 시위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사진①)
● 태극기를 지킨 자랑스러운 국군과 유엔군
이승만 대통령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태극기 시위를 벌이기 9일 전인 7월 16일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전란을 당해 서울을 떠나 피란하고 국군이 후퇴하여 공산군이 입성한 후에 일부에서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일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민심을 선동합니다. (미국에 누차 요청한 군사지원을 받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인데) 제갈공명이 국무총리가 되고, 관우와 장비가 총사령관이 되었더라도 어떻게 공산군의 장총과 대포와 전차를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1950년 9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천상륙경축대회에서 말했다.
“석 달 동안 집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온 국민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지내는 동안, 수많은 우리 국군 장병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한 유엔군이 들어와서 수천 명의 희생자와 부상병을 내던 중에,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큰 희생 없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국민 모두가 이를 경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진②)
1951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6·25사변 1주년’ 연설을 했다.
“통일국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맹서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남녀노소와 남북한을 막론하여 한민족 모두의 뜻입니다. 우리가 절실하게 바라고 기도하는 바는 이 전쟁이 모든 민주국가의 대승리로 머지않아 결말이 나서 전쟁터가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공정하고 장구한 평화가 도래하고 통일 민주국가의 태극기가 한반도 전체의 구석구석까지 자유롭게 휘날리는 것입니다.”
소련이 만들어준 인공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말살하려 했던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의 무력침공은 국군과 유엔군의 용전(勇戰)으로 저지됐다. 그러나 38선 이북에까지 태극기를 휘날리게 함으로써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범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우리 국군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사진③)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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