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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한민족의 상징’ 정통을 잇다

입력 2014. 12. 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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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태극기를 계승한 국가, 태극기를 배신한 왕조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선출하고 정부 수립 공포

은 인공기 내세워 독재왕국 건설 야욕 본격화 

 

 

 


 

 


 


 

 

 

 

광복 후 남북한 태극기 우표의 차이

 광복 후인 1945년 9월 14일 미 군정청은 일제로부터 우편업무를 접수하고 일시적으로 일제가 발행한 우표 위에 조선우표라는 글자와 가격을 표시해 활용했다.

그러나 곧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했으며, 1946년 5월에는 해방 후 최초로 태극기 디자인 우표가 발행됐다. 북한에서도 같은 해 태극기 우표가 발행됐는데, 태극기를 배경으로 김일성 삽화가 실렸다.

 남북한 모두에서 태극기를 우표 디자인으로 활용했지만, 당시 남북한의 정치 상황은 극명하게 달랐다. 미국은 한반도에 독립 민주국가가 수립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극기를 든 남성과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 등 평범한 가족이 이를 보여준다.(사진①) 반면에 북한을 장악한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보스턴마라톤대회의 태극기

 이렇게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정치적 이상 징후가 보이는 가운데, 태극기와 ‘KOREA’가 세계만방에 이름을 드높이는 쾌거가 있었다. 1947년 4월 19일 미국에서 개최된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2시간25분39초라는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것이다.(사진②)

 미국 언론은 서윤복의 우승을 ‘기적’이라고 했으며, 세계 언론도 중요 뉴스로 다뤘다. 이런 국제적인 찬사와 놀라움 이외에 서윤복은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감격을 선사했다. 그것은 바로 손기정 선수가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에서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것과 상관이 있다.

 손기정은 한여름 뜨거운 돌바닥 위를 달려 2시간29분19초2라는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나 오른쪽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만 했고, 국내에서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한이 사무쳤던 그는 광복 후에 체육지도자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서윤복 선수가 보스턴에서 막판에 선두를 제치고 질주할 때, 태극기와 ‘KOREA’라는 표지를 단 제복을 입은 35세의 사나이가 “윤복아, 조국을 위해 더욱 힘차게 달려야 한다”고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바로 손기정이었다. 그는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서윤복의 감독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윤복이 세운 기록이었다. 그는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수립한 후 11년간이나 깨지지 않았던 세계신기록을 4분, 자신의 최고기록을 14분이나 앞당겼다.

 우승 후 약 2개월 만인 1947년 6월 22일, 서윤복 선수와 손기정 감독이 태극마크와 ‘KOREA’라는 국호가 뚜렷한 제복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는 영웅들을 환영하는 만세 소리와 태극기 물결로 뒤덮였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도 이들을 아낌없이 격려해주었다.



태극기를 계승한 대한민국

 서윤복의 쾌거로 한민족의 태극기 사랑이 한층 고조되고, 국제적으로 한반도통일국가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의미 있는 결의를 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기 위해서 남북한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남한은 이 결의를 따랐으나, 소련은 북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거부하고, 유엔감시위원단의 입국도 금지했다.

 남한에서는 유엔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을 위한 총선거가 시행됐다. 유엔감시위원단 참관하에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국회의원을 직접 뽑는 민주선거였다. 1948년 5월 31일 민의에 의해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은 제1차 회의를 열고,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1948년 7월 17일에는 헌법이 제정됐고, 7월 24일에는 의회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는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사진③)



대한민국 국기의 제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 7일 문교부는 ‘국기제정위원회 구성준비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2월 3일 입법부·사법부·학계·언론계·미술계·공공단체 등 각 분야에서 42인을 국기제정위원으로 위촉하고, 1949년 2월 7일 국기제정위원들은 중앙청에서 첫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대다수 위원들은 1)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태극기로 뭉쳐 일제와 싸웠고, 2)수많은 애국선열이 태극기를 휘날리다가 혹은 태극기를 지키기 위해 순국했으며, 3) 태극기는 한민족의 마음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상징이라면서 새로 국기를 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수 의견에 따라 국기의 제정보다는 기존 태극기 도형과 규격을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짓고, 국기제정위원회라는 명칭을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로 변경했다.

 국기시정위원회는 모두 5개의 도안을 심의에 올렸으며, 1949년 2월 23일 12인으로 구성된 특별심사위원회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국기를 통과시켰다.

참고로 닷새 후 결정을 번복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3월 25일 원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국기시정위원회의 보고서는 1949년 10월 12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2호로 국기제작법이 공포됐다.



태극기를 배반한 김일성 왕조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한 데 반해, 북한은 철저히 소련의 위성국가로 변모해가면서 태극기를 배신하고 있었다. 소련 점령군의 조종을 받은 북한 김일성 집단은 민심 수습을 위해 일시적으로 태극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소비에트화 과정이 마무리돼 가던 1947년 11월 북한은 이미 새로운 국기 제정에 착수했다.

1948년 2월에는 기본 모형을 완성하고, 4월에는 도안을 확정했으며, 7월에는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시범적으로 달았다. 이어 9월 9일 공산독재왕국을 선포하고 인공기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말 유럽의 소련 위성국가들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은 것에서 보듯이, 한민족의 태극기가 시대착오적인 공산독재 왕조의 인공기를 대체할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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