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챔프,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

골인지점 ‘날 들이밀기’처럼…적 중심에 힘 집중해 기습적으로 뚫어라

입력 2014. 12. 03   15:46
0 댓글

<50> 쇼트트랙과 집중·기습



 

 

   점점 세찬 바람과 함께 추위가 매서워진다. 힘의 스피드스케이팅보다 한국 쇼트트랙은 힘 집중과 날 들이밀기 기습으로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력 집중과 기습은

   제8편 9장은 전쟁론의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이른바 전역(戰域)계획이기도 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일 때의 전쟁계획’이다. 병력 집중과 분산, 기동, 최고지휘부 운용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적 군사력을 될 수 있는 대로 소수 중심으로, 할 수 있다면 중심으로 이끄는 것이다. 즉, 집중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계획을 수립할 때는 적 군사력의 여러 중심을 알아내고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한 점으로 모으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 투입해야 하는 병력들이 하나의 중요한 행동으로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가 강조한 중심은 4장 ‘전쟁목표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에서 ‘모든 전투력 발휘에서 공격은 적 중심점에 집중돼야 한다’라고 한 것을 다시 언급했다.

 이어 전투력 집중은 목표를 향한 가장 짧은 길로 신속한 기동, 즉 기습이 요구된다고 했다. 그는 ‘부분 전투 승리는 완전한 승리로 직결된다. 어제 성공은 오늘 성공을 좌우하며 승리의 불은 다른 불에 옮겨붙는다. 그러므로 적을 향해 끊임없이 신속히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전투력을 회복하거나 지원 병력을 얻게 되는 시간을 주게 된다’라고 했다. 따라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적 중심에 대한 집중과 신속한 기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 쇼트트랙은 골인지점 직전까지 상대 스퍼트 방지에 집중하다가 기습적인 날 들이밀기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쟁론의 제8편 9장의 이야기와 딱 들어맞는 경기이다.

 

쇼트트랙과 날 들이밀기

쇼트트랙은 ‘short track speed skating’의 약칭으로 111.12m 아이스링크 트랙에서 펼치는 경기다. 넓은 경기장이 필요한 스피드스케이팅에 비해 60×30m 공간이면 충분하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시작됐고,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성행했다. 피겨는 음악, 컬링은 팀워크, 아이스하키는 골을 넣는 얼음 위 스포츠라면 쇼트트랙은 짧은 거리를 좁은 공간에서 속도와 기술로 경쟁하는 흥미로운 경기다.

 서구 선수들의 힘에 의한 우월함에 비해 한국은 실력뿐만 아니라 ‘깜짝 전술’로 세계 최강 자리를 지켜왔다. 1992년 알베르빌에서 외발타기,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서는 ‘날 들이밀기’,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에서는 계주 막판 주자가 바통 터치를 하지 않고 한 바퀴 더 도는 전략으로 금메달을 일궜다. 체력과 기술연마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의 투자였다. 월드컵 대회는 4번 열린다. 그런데 1·2차 대회에서는 메달보다 상대 전력을 분석하는 데 치중한다. 진짜 실력 경쟁은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3·4차 대회 때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직선과 곡선 비율이 비슷해 선두 자리 잡기가 중요하다. 순간적으로 인코스로 비집고 들어가거나, 비축된 힘을 바탕으로 아웃코스로 추월하는 방법이 있다. 개인 종목에서도 상대 선수 견제를 위해 동료 선수와 호흡도 중요하다. 쇼트트랙에서 일관된 선두 유지는 어렵다. 레이스 과정에서 힘과 스피드의 집중과 분산을 통해 결승점에 이르는 전술이 요구된다. 클라우제비츠는 9장에서 프리드리히 전투 사례를 통해 병력 집중과 분산을 역설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사선대형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Ⅱ·1712∼1786)은 전쟁론에서 계속 언급된다. 클라우제비츠가 프로이센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복했는지 모른다. 당시까지만 해도 양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횡대 대형으로 펼쳐 전투를 벌였다. 그는 우수한 자신의 군대를 활용해 파괴력 높은 새 전술, 사선대형을 개발했다. 작전이 개시되면 병사들 일부는 적 앞에서 견제하면서 주의를 끌었다. 나머지 주력은 종대를 이뤄 행군하되 뒤 열이 앞 열보다 뒤처지는 형태로 적군에게 비스듬한 각도로 접근했다. 이들 대열이 적 측익에 접근하면 나중에 도착한 열들이 앞 열 뒤를 이어 적 중심을 기습적으로 뚫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커다란 말들이 대포를 끌고 다녀 그 속도가 매우 느려 보병과 기병들이 포병 지원을 즉시적으로 받지 못했다. 또 탄약을 넣고 포환을 발사하는 포병대원들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말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는 가벼운 대포를 활용하는 기마 경포병대를 구성해 기동속도를 증가시켰다. 그리고 포병대원들을 모두 말에 태워 기병대와 함께 기동함으로써 보병을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영광은 사후 20년 만인 1806년 예나 전투에서 그가 생전에 이뤄 놓은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러한 뼈아픈 경험을 전쟁론을 통해 남긴 클라우제비츠의 유산 덕분에 독일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최강 전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이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

<오홍국 정치학 박사>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