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모진 시련 끝에 다시 찾은 태극기
한인애국단 이봉창·윤봉길 의사, 한민족 기개 세계만방에
1936년 광복군 창설 본격화 … 독립운동 중추적 역할 수행
1945년 日 패망 … 독도·위안부 등 그들의 야욕은 진행형…
광복군의 태극기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했고, 2)같은 해 9월에는 대통령제를 택했으며, 3)1940년 12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국가로 채택했고 4)1942년 6월 규격이나 문양이 정형화되지 않았던 한민족의 국기 태극기를 법제화했다.(사진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과 위상에 대해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26년간이나 존속하면서 이념을 넘어 한민족의 구심으로서 대한독립운동을 주도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소를 옮겨가며 일제의 침략만행에 강력히 저항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의 마수를 뻗쳐갈 때, 이봉창 의사는 일왕 제거를 시도(1932년 1월)했고, 일제의 상하이 점령 후 윤봉길 의사는 일본파견군사령관 등을 처단해 한민족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쳤다. 두 분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다.
이런 경고에도 일제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1937년 중일전쟁을 개전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렇듯 급변하는 정세는 임시정부 외교노선의 변화와 조직적인 무장독립투쟁을 촉발시켰다.
임시정부는 군사조직법을 바탕으로 1936년부터 광복군 창설을 본격화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40년 5월부터는 광복군 창설을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을 개시했으며, 8월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안을 승인받고,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을 공표했다.
창설 선언문에는 1)광복군이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됐으며, 2)중화민국과 합작해 두 나라 독립을 회복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창군 목적이 천명됐다. 광복군은 비록 자주성에 한계는 있었지만, 광복에 이르기까지 항일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사진②)
일제의 마지막 총독 아베
1944년 7월 22일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부임했다. 직업군인이자 3개월 남짓 일제총리를 지낸 그가 부임 시 내뱉은 첫마디는 일제의 발악적인 행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 완수의 근본은 사람에게 있으며, 그 전제조건이 되는 물자 확보를 위해서 한반도가 가진 산업경제 등 중요한 자재를 전력 증강에 쓰겠다.”(경성일보 1944년 7월 25일)
그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40~80% 이상을 우리나라에서 징발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가혹한 착취를 개시했다. 징병 및 징용(강제로 동원해 노역을 시킴) 확대와 여자 근로정신대, 조선국민의용대 등 조직이 대표적인 사례다.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근로정신대란 이름으로 남자와 마찬가지로 군수공장, 후방지역의 증산운동, 그리고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갔다. 또한 만 12세 이상 65세 미만의 남자, 그리고 만 12세 이상 45세 미만의 여자들이 연합군의 상륙을 육탄으로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동원됐다.
일제가 대부분의 기록을 파기해 수치 산출이 힘들지만, 학자들은 약 600만~700만 명(한반도에서 동원 인원: 450만~550만 명, 일본에 끌려간 인원 100만~150만 명)의 조선인이 동원됐다고 말한다. 군용으로 징발된 조선인 희생자의 사례에 대해 고려대학교 김성식 교수는 말한다.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37만 명의 조선인 중에서 15만 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됐다.”(‘광복을 찾아서’, 1969년, 신구문화사, 490쪽)
이는 우리가 당한 인적 희생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에 3·1운동, 항일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분들을 더하고, 나아가 1905년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분들의 희생을 더하면 수치가 과연 얼마나 될지, 애통함과 분노를 가눌 길이 없다.
일제는 인력뿐만 아니라 쌀과 한우 등도 약탈했다. 전쟁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쌀을 자국으로 반출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으로 연명해야 했다. 또한 철강을 비롯한 각종 천연자원도 강탈하고,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는 고철, 놋그릇, 수저까지 징발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
태극기를 제정해 나라의 자주독립을 도모했던 고종황제와 일장기를 혐오했던 명성황후는 물론,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던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가증스러운 만행에 대한 결정적인 벌은 하늘에서 떨어졌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망자 수만 20만 명을 넘었다. 사흘 후에는 나가사키에 제2의 핵폭탄이 투하됐다.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어 800대의 B-29 폭격기가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폭탄을 퍼부었다.
8월 15일 정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왕의 육성 녹음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9월 2일 오전에는 미국 미주리 함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됐다. 미국 측 대표는 맥아더 장군이었고, 일본 측 대표는 지팡이를 짚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었다.(사진③)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불구의 몸으로 맥아더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처지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송두리째 착취했던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를 위시해 필부들까지 모든 일본인들이 허둥지둥 쫓겨나는 마당에 우리 민족에게 들려주고 간 일관된 말이 있다. “다시 돌아오겠다.”
일제 모리배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의 주인으로 되돌아오겠다는 야욕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악마들의 허망한 꿈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독도에 대한 집요한 억지주장과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의 야욕이 아직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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