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미동맹60년 함께가는 60년

부족한 美軍 병력 지원 … ‘한미동맹의 상징’

김철환

입력 2013. 12. 2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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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 김철환 기자droid001@dema.mil.kr


 “한국에서 연합작전을 위해 카투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카투사 제도의 장점을 다른 미군들도 알았더라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 타국에 파병 및 연합작전을 수행할 때 훨씬 원활한 작전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존 존슨(John. D. Johnson) 전 미8군사령관

[인터뷰]이석재 대령 주한미8군 한국군지원단장-˝한국군 전체 이미지 대변… 더욱 투철한 국가관 요구돼

 “미군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접하는 한국군이 바로 카투사이며, 이들을 통해 한국군의 능력을 평가합니다. 따라서 카투사들은 미군들이 한국군을 바라보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석재(대령)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은 카투사가 주한미군과 가장 가까이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한미동맹의 최첨병’이라는 것과 함께 ‘미군과 똑같은 임무를 맡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단장은 “카투사들은 미군에 있는 150여 개 특기 중 전투부터 전산, 공병, 행정, 화학 등 44개 특기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라며 “우수한 평가를 받은 장병들에게는 포상은 물론 미군에 대한 지시권한도 부여된다”고 말했다.

 카투사들을 위한 주요 포상에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병사에게 주어지는 ‘백선엽 보드’와 미2사단에서 선발하는 ‘베스트 카투사’가 있다.

 이 단장은 “실제로 상당수의 카투사들이 업무와 훈련, 각종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같은 계급의 미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곤 한다”고 말했다.

물론 어려움도 존재한다. 생각보다 많은 카투사가 군사영어를 활용하는 의사소통·체력을 중시하는 미군의 훈련과 문화적 차이 등으로 군복무가 쉽지 않음을 느낀다고. 간혹 외국 생활을 오래한 카투사의 경우 우리나라와의 문화적 차이를 겪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고 카투사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주는 것은 이 단장과 미8군 한국군지원단의 몫이다. 이를 위해 한국군지원단은 카투사들에 대한 교육과 권익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교육에 대해 이 단장은 “미군과 함께 생활하는 특수한 환경에 있는 카투사들은 한국군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하기 때문에 더욱더 투철한 국가관과 자기 절제력, 헌신이 요구된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행동하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 지휘 받고 있지만 신분은 ‘대한민국 육군’ 인적자원 수준 높아 본연의 임무 외에도 한미장병 친선 뒷받침

주한미군의 우수야전보병휘장 테스트에 참가한 한 카투사 병사가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주한미군과 함께 근무하며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미군 군복을 입고 있지만, 오른팔에 부착한 태극기로 구분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군인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한미연합사령부와 더불어 한미동맹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카투사(KATUSA :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다.

 카투사 제도는 한 국가의 군인이 타 국가의 군인과 혼합 편성돼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제도다.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지만 이들의 신분은 ‘대한민국 육군’이다.

 카투사 제도의 기원은 6ㆍ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뤄진 지속적인 감축정책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으며, 극동지역의 미군도 한반도에서 북한군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기에 충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구두합의가 이뤄지면서 미군부대에 배속돼 함께 싸우는 한국군인 카투사가 탄생하게 됐다.

 최초의 카투사 병력은 1950년 8월 15일을 전후해 피난민이 많이 모여 있던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불시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으로 구성됐다. 이러한 급속한 징집을 통해 같은 해 9월에는 1만9000여 명에 이르는 카투사가 미군부대 내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다양한 전장에서 미군과 함께 했다.

 정전 후에도 카투사 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감소운영으로 여전히 병력측면에서 카투사 제도를 통한 충원이 필요했으며, 군사주특기를 지닌 잘 훈련된 요원과 전문기술직 요원을 양성해 한국군에 제공한다는 것이 제도 지속의 이유였다.

 이후 1965년 카투사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연락장교단이 파견됐고 이를 근간으로 1986년 한국군지원단이 창설됐다. 한국군지원단은 1997년 육군본부 예속부대로, 2009년에는 육군본부 인사사령부 예하부대가 됐다.

 카투사가 군복 우측 소매에 태극기 문양을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태극기의 부착은 미군에게 대한민국 군인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인식을, 카투사에게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카투사는 주한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한민국의 안보에 기여하고 있다. 카투사의 역할이 확대되고 위상이 높아진 데에는 인적자원의 고급화가 주요 원인이 됐다.

 이는 선발제도의 변천과도 큰 관계가 있다. 카투사 창세기에는 100% 신병으로 보충됐으나, 1957년부터는 신병 70%와 한국군 부대에서 차출된 인원 30%로 혼성 구성했다. 이후 차출 인원의 비율을 점진적으로 축소해 1968년에는 다시 전 인원을 육군훈련소 신병 중에서 뽑았다. 카투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1982년부터는 민간공개모집을 시작했다. 자유경쟁시험을 치러야 했음에도 당시의 카투사 경쟁률은 최대 20 대 1에 달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이 어학시험성적이 선발조건이 된 것은 1999년부터다.

 카투사 인적자원 수준이 크게 높아진 것은 시험으로 선발하기 시작한 1980년대 즈음이었다. 60년대만 해도 카투사의 학력수준은 미군보다 낮았지만, 1988년 조사에서는 카투사의 93%가 전문대 재학, 2011년에는 99%가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우수한 능력을 갖춘 카투사들이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주한미군의 각종 경연대회에 미군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해 월등한 성적을 거두는 사례가 축적되면서 미측의 인식도 전환됐다.

특히 체력과 전투기술에 관한 분야에서도 카투사가 미군보다 열세일 것이란 고정관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올해도 주한미군과 카투사 430여 명이 도전해 단 20명만이 통과한 우수야전보병휘장(EIB) 테스트에서 정효근·김우영 상병 등 카투사 2명이 당당히 합격해 카투사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정립한 바 있다.

 카투사들은 본연의 임무 외에도 군사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한미동맹 강화에 일조하고 있다. 카투사와 미8군 한국군지원단이 수행하는 주요 친선 활동으로는 주요 명절에 미군 장병을 카투사의 집으로 초대하는 ‘자가초청행사’, 미군과 그 가족들에게 제공되는 ‘한국 전통문화 체험’ ‘태권도 교육’ ‘한글교육’ 등이 있다.

 카투사에게도 주한미군 기지이전과 함께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한국군지원단 미2사단지역대와 용산지역대, 평택지역대, 대구지역대 등 4개 지역대는 2016년을 목표로 평택과 대구의 2개 지역대로 통합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이석재(대령) 주한미8군 한국군지원단장은 “평택을 허브로 카투사 지원에 최적화된 효율적 조직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환 기자 < droid001@dema.mil.kr >
사진 < 김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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