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진정한한국의벗 밴플리트장군

美측 6·25전쟁 더 이상 개입 않으려 하자 크게 실망

입력 2013. 11. 1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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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굿바이, 아들이여! 코리아여!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정의에 어긋나” 전역 결심   환송행사땐 서울시민 3분의 1 운집…아들 혼 남긴채 본국으로

 

 

 

 

●부임 1주년 기념 퍼레이드 

 1952년 3월 19일, 밴 플리트는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회갑연을 치렀다. 그것은 천수를 누린 노인에게 푸짐한 잔치를 해주는 풍습을 가진 한국에서 성대한 회갑연을 맞았고,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갓 한국 전선에 부임한 외아들 지미가 잔치에 참석해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잘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이 부자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지만!

 밴 플리트가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란 사실은 그의 회갑에 즈음한 일정(日程)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회갑 이틀 전(3월 17일), ‘한국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들’을 돌보는 서울 컬럼비아 고아원을 방문했다. 106명의 고아들에게 1만1000달러 상당의 옷과 담요 등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그 고마움을 춤과 노래로 화답했다.

 1952년 4월 5일 아들 지미가 북한지역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는 아픔을 맛봤지만,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을 준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인들이었다. 아들 실종 직후인 4월 14일 밴 플리트는 한국 부임 1주년을 맞아 덮개 없는 지프를 타고 서울시 퍼레이드를 벌였다.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일지 몰라도, 당시 대한의 국민들은 그렇게라도 자식 잃은 그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한 그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1952년 5월 22일, 클라크 장군이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됐다. 밴 플리트에게 클라크도 리지웨이와 마찬가지로 사관학교 후배였으며, 리지웨이와의 관계보다는 조금 나았으나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밴 플리트는 휴전회담 개시 이후 한국군 증강계획 실천에 대해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었으나, 제한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데 대한 실망과 불만이 컸고, 근무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런 감정이 더욱 증폭됐다.

 게다가 밴 플리트 부임 직후 공산군 포로들이 거제도에 수용됐고, 휴전회담의 중요 의제 중 하나인 공산군 포로 관리 책임이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 공산군 포로의 정치적 망명 문제로 휴전회담이 난관에 봉착하고 심지어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용소장인 미군 장성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밴 플리트는 1952년 6월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크는 이후 포로문제를 극동사령부 직속의 한국병참관구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이는 밴 플리트의 포로문제 처리에 대한 클라크의 불만 표시였지만, 밴 플리트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생각했다.

 
●전역 결심

 1952년 여름,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협상에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고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단기적인 공세에 치중했다. 많은 사례가 있으나 불모(不毛)고지 전투를 소개하기로 한다.

 1952년 6월 6일 미 제45사단이 북쪽의 불모고지, 포크촙고지(Porkchop Hill) 등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던 고지들을 점령했다. 6월 26일 중공군은 불모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수십 차례 공격했으나 3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미 제45사단이 제2사단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틈타 7월 17~18일 야간공격으로 불모고지를 다시 탈취했다. 제2사단은 8월 1일 재점령했으나 9월 18일 중공군에 빼앗겼다가 9월 20일에 재탈환했다.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미군은 전사 39명, 부상 234명, 실종 84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중공군은 1093명의 사상자를 냈다. (‘The Will to Win’, 285~287쪽)

 이 같은 병력손실은 전투에서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미국에 반전분위기가 팽배했던 터라 문제가 컸다. 그러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대대급 이상의 작전수행은 반드시 자신의 승인을 받도록 지시했다.

 밴 플리트는 클라크와 워싱턴 당국이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전쟁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런 사조가 미국의 젊은이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정의라는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9월 27일 밴 플리트는 전선을 방문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자신의 전역을 건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방한 

 전역해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밴 플리트는 자기의 육사 동기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선출되고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하자 한국전쟁을 군사적인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당선자가 유세 때 “내가 당선되면, 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1952년 12월 3일 밴 플리트는 한국에 도착한 당선자에게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고 한반도에서 공산군 축출을 위한 적극적인 공세를 재개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당선자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만 한국군 증강 문제만은 차기 국방장관 내정자에게 처리토록 지시했다.

 밴 플리트에게 1952년 크리스마스는 행복했다. 19개월 만에 재회하는 아내 헬렌과 함께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은 11월 말에 한국에 도착해 한 달간 머물렀다.

 밴 플리트의 귀임일자는 1953년 2월 12일로 결정됐다. 귀국일이 다가옴에 따라 그는 제8군, 한국군 부대를 시찰하고 한국 정부와 단체에서 베푸는 환송행사에도 참석했으며 서울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특히 1953년 1월 30일 환송행사에는 서울시민 3분의 1이 운집했다고 한다. 1953년 2월 11일 그는 제8군사령부에서 개최된 짤막한 이·취임식에 참석한 후 2월 12일 한국을 떠났다. 아들 지미의 혼을 남겨두고!

 
●한미우호증진의 가교(架橋) 

 밴 플리트는 퇴임 후 주한미국대사 물망에 올랐었다. 휴전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비장의 카드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을 존경하고 자신도 휴전에 반대하던 그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휴전 후 밴 플리트는 대한(對韓) 군사 및 경제원조, 한국의 재건과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1957년에는 ‘Korea Society’를 만들어 한미우호증진을 위한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1961년 5·16 후 밴 플리트는 군사정부의 입장을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조 및 민간투자 유치를 위해 뛰었다. 군부지도자들도 6·25전쟁 때 그의 지휘 아래 피 흘리며 한반도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기에 그를 존경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는 만남과 서신 등을 통해 밴 플리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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