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진정한한국의벗 밴플리트장군

병력증강·교육 등 한국군 정예화 온 힘 다해

입력 2013. 11. 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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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군의 아버지


22개월 간 8군사령관 근무시 한국군 장병과 생사고락  한국군 10개→20개 사단으로 증강 결정적 후원자 역할

 

 

 

 

●이승만 대통령의 미 의회연설

 1954년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28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 의회에서 연설했다. 연설의 서두에서 그는 6·25전쟁 당시 우리를 도운 미군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클라크, 테일러 등 유엔사령관과 제8군사령관은 이름만 거명한 반면,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승만 대통령 방미일기’, 2011년. 참조)

 “1951년,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청년들의 군인다운 용감한 정신, 가정과 조국을 위해 싸울 테니 총을 달라는 열화 같은 요구를 발견한 사람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광주·논산, 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훈련시켰습니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전선에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군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밴 플리트 장군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한국군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타이핑해서 작성한 미 의회 연설에 밴 플리트가 ‘한국군의 아버지’로 명기(明記)된 것은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당시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였다. 일부에서는 밴 플리트를 ‘한국 육군의 아버지’, ‘한국 육사의 아버지’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왜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에게 어색하지 않은지 그 이유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밴 플리트는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할 시 우리 나이로 60세였다. 반면에 당시 우리 군 장성들의 연령은 대부분 30세 전후였다.

 둘째, 밴 플리트는 6·25 중 22개월 간 제8군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워커(5개월 반), 리지웨이(3개월 반), 테일러(5개월 반) 사령관의 전시(戰時) 근무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우리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헌신했다.

 셋째, 밴 플리트는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실종된 정의감 넘치고 용맹스러운 외아들 지미의 모습을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용맹스러운 한국군 장병들에게서 봤고 그들을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넷째, 밴 플리트는 미국인 중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갖고 한국군 증강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면, 밴 플리트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렸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잠시 한국군 증강을 위한 그의 기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제한 전쟁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전쟁의 성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전쟁을 제한전쟁(制限戰爭·Limited War)이라고 부른다. 제한전쟁의 사전(辭典)적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6·25 발발 후 대한(對韓) 군사지원을 결정한 트루먼 정부의 목표는 침략자들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한편,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그는 압록강까지 진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후퇴했고, 맥아더는 해임됐다.

 맥아더 해임 3일 후인 1951년 4월 14일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는 비록 트루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맥아더의 전략에 더 호감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해 4~5월의 중공군 대공세를 분쇄하고 내심(內心)으로는 승세를 몰아 군사적 승리를 원했으나, 트루먼 정부의 반대에 직면했다. 한편,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공산 측의 휴전 제안으로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정이 개시되자 유엔군의 전략은 제한적 공세로 전환됐고 한국전쟁은 실질적인 제한전쟁이자 소모전(消耗戰)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 증강에 기여

 제한전쟁은 밴 플리트에게 걸맞지 않은 힘든 과제였다. 휴전협상 개시 이후 유엔군 장병들 사이에 전투를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자, 그는 언젠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군이 자력(自力)으로 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병력증강과 교육·훈련계획에 몰두하는 등 한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실천으로 옮겼다. 우리가 그를 진정한 한국의 친구이자, 우리 군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6·25 기간 중 뉴스위크(NEWSWEEK)는 밴 플리트를 두 차례 표지인물로 다뤘다. 첫 번째는 이미 소개한 1951년 10월 29일이고, 두 번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을 앞두고 한국군 증강에 관한 밴 플리트의 공헌을 다룬 1952년 11월 17일이다. 관련기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한국군은 밴 플리트가 입양한 영양부족의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이를 튼튼하게 양육시켰다. 한국군 병력 수를 25만2000명에서 36만2000명으로 늘렸고, 한국군 1개 사단마다 미군처럼 72문의 곡사포를 할당하는 등 중무장(重武裝)하도록 지원했다. 한국전선의 한국군 병력 수는 미군을 넘어섰으며, 전상자의 수효도 한국군이 미군보다 많아졌다.

 밴 플리트는 지난주 미국 정부로부터 기존의 한국군 10개 사단에 2개 사단을 증설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는 한국군이 20개 사단으로 증강돼야 하며, 이를 통해 주한미군을 대체할 수 있고 경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현재 한국군 중장의 월급은 37만2000원(약 31달러)이며, 일등병은 월 3000원(25센트)이다. 한국군 1개 사단의 월 급여총액은 2만9155달러다. 반면, 미군 1개 사단은 병력 수가 한국군 사단보다 1.5배이기는 하나, 병참경비를 제외한 월 급여총액만 530만8875달러다.

 밴 플리트는 미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KMAG)에 의한 한국군 교육훈련에 최대 역점을 두고 있다. 대구 소재 미 군사고문단은 632명의 미군 장교와 1300명의 병사로 구성됐는데, 밴 플리트는 이들과 스스럼없이 사적인 대화도 나눌 정도로 친밀하게 지내면서 한국군 교육훈련 활동을 독려한다. 고문단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지난주에 소장으로 진급한 라이언(Cornelius Ryan) 장군이다.

 한국군 신병은 전쟁 초기에 10일 내외의 훈련을 받고 전투에 임했지만, 현재는 미군처럼 16주간 기본훈련을 받으며, 부사관은 8주간 더 훈련을 받는다. 2만5000명의 한국군 장교 중에서 1000명이 미국에서 고급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앞으로 더 많은 장교가 미국에서 훈련받게 될 것이다.” (‘NEWSWEEK’, 1951년 11월 17일, 19~20쪽)

 뉴스위크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밴 플리트는 카투사 프로그램 시행과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처럼 우수한 장교를 육성하는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재창설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60년 3월 31일 육군사관학교에는 밴 플리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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