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밴 플리트를 감동시킨 할머니
전쟁터 잿더미 속에도 “언젠가 손님들이 돌아올 거요” 외딴 골목 노점상 노파와의 대화에서 서울 사수 결심
●밴 플리트 추모엽서
밴 플리트가 타계한 다음 해인 1993년 3월 19일, 미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엽서가 발행됐다. 이날은 그의 101세 생일이었다. 엽서는 저명한 역사인물 화가(畵家) 하워드 코슬로우가 그린 밴 플리트 장군 초상화와 이력사항이 담겨 있다. 이 엽서에 소개된 밴 플리트의 이력에는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 제8군을 궤멸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때, 밴 플리트는 장병들에게 적을 가혹하게 응징(severe punishment)하면서, 적의 예봉은 피하라(roll with the punches)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들은 지시를 따랐다. 이어 그는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는 역공을 지시했다. 곧 제8군은 한반도 중북부의 전략적 요충인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했다.”
엽서는 6·25전쟁에서 밴 플리트의 업적을 매주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밴 플리트가 막강한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되, 적의 인해전술에 말려들지 않는 전략을 통해서 1951년 봄, 두 차례에 걸친 공산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고 적에게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 저지
공산군은 밴 플리트가 부임한 지 1주일 만인 1951년 4월 22일, 한반도 중서부의 제8군에 대한 대공세를 개시했다가 큰 타격을 받고 퇴각한 다음, 그 실패를 만회하고자 절치부심했다. 중공군은 제1차 공격에서 제8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무력화된 사실을 교훈 삼아, 한국군을 집중 공략함으로써 한국군을 제8군과 분리시키고, 남쪽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밴 플리트는 적의 공격징후를 보고받고, 북한강지역으로 적이 침투할 것으로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5월 16일, 춘천 동쪽의 소양강을 넘어 서남쪽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적의 공격 시기는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적의 주공격 위치 예측은 빗나간 것이다. 이 공격으로 한국군 3군단이 와해되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적은 9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 숫자는 전방에 투입된 적 병력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5월 20일, 밴 플리트는 대반격을 개시했다. 철의 삼각지대인 문산~철원 지역 일대를 공격한 것이다. 미 제1군단은 철원과 김화를 점령하고 철의 삼각지대를 공격해 도로입구를 봉쇄했으며, 제9군단은 5월 28일 화천을 점령했고, 제10군단은 능선을 차례로 공격해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계곡 일대를 점령했다.
한편, 한국군 제1군단(군단장 : 백선엽 장군)은 미 해군 화력의 도움으로 동부 연안도로를 따라 북으로 진격해, 간성을 점령함으로써 6만 명 이상의 공산군 퇴로를 막았다. 이들의 대다수는 한국군에 투항했고, 나머지는 개별적으로 혹은 소규모로 무기를 버리고 그 지역을 탈출했다.
전승에 고무된 밴 플리트는 리지웨이에게 동부 연안도로를 따라 대규모 공격을 건의했으나, 리지웨이는 부랴부랴 방한해 북진을 막았다. 당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결국 이때 6·25전쟁의 전선이 거의 고착된 것이다. 한편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산군은 인해전술로는 현대화된 아군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협상을 제안하게 된다.
●밴 플리트가 서울 사수를 결심한 이유
밴 플리트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장군이었다. 공산군의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후, 그는 가능하면 서울의 제8군 전방지휘소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70세가량의 굶주려 찌든 흔적이 얼굴에 역력한 작고 허약한 노점상 할머니를 잊을 수 없다. 포탄상자 위에 앉은 그녀의 무릎 위 쟁반에는 한국사탕, 미국 껌, 연필, 안경, 미 남부동맹 깃발, 그리고 보잘것없는 물건 몇 개가 담겨 있었다. 물품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으나, 장사를 벌여놓은 장소가 특이했다. 서울의 가장 외딴 지역 골목이었고, 주변에는 부서진 벽돌들뿐이었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통역장교에게 그녀의 대꾸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여러 날 손님이 없어요. 그러나 전쟁 전, 이곳에 있을 때는 손님이 있었거든요. 그들이 돌아올 겁니다.’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는 서울이 살기 시작했다.” (
이런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사진을 볼 수 없어서 아쉽다. 대신 당시 서울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수많은 한국인의 모습 중에서 1951년 한여름에 어린이와 할머니가 소쿠리에 담긴 강냉이 튀밥을 팔고 있는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그들이 파는 튀밥은 한 봉투에 1.5페니(100원)였다.
●아들보다 먼저 죽을 고비를 맞다
밴 플리트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은 여러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아이스크림 때문에 외아들 지미보다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공산군의 춘계 대공세를 분쇄한 후인 1951년 6월 말, 밴 플리트는 속초 주둔 한국군 제1군단의 브리핑에 참석했다. 마침 미 제5 순양함대(분대, 전대로도 표기) 사령관 버크 제독도 참석했는데, 이유는 제1군단이 종종 미 해군의 함포(艦砲)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브리핑이 끝나자 밴 플리트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버크 제독이 그를 기함(순양함: USS Los Angeles CA-135)에서의 아이스크림 파티에 초대했다. 헬리콥터를 이용할 경우 편도로 15~20분 정도 거리이므로 밴 플리트는 기꺼이 응했고, 둘은 순양함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착륙 시 조종사가 너무 낮게 비행하는 바람에 헬리콥터가 기함과 충돌해 넘어지면서 연료를 쏟으며 꼬리 부분이 뱃전 너머로 매달려 있었다. 밴 플리트는 창문을 통해 갑판으로 탈출해서 버크를 끌어낸 다음, 조종사를 구출했다.
버크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아이스크림의 토핑을 무엇으로 할지 물었고, 밴 플리트는 ‘파인애플’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하마터면 두 사령관을 황천길로 보낼 뻔했던 조종사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밴 플리트가 그를 아이스크림 파티에 참석시킴으로써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버크는 그날 밴 플리트가 약 2리터(a half gallon)의 아이스크림을 실컷 즐겼다고 회고했다. 귀환 시에는 파손된 헬기 대신에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상륙정을 이용했는데, 미숙한 풋내기 해군 장교 대신 버크가 직접 조종간을 잡았다. (‘The Will to Win’, 260~261쪽)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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