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우리고장명人명당

<70·끝>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

입력 2012. 12.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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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 다리 되게… 교회 높은 담 헐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마다 각기 존경하고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외국에서조차 성군으로 받드는 세종대왕, 만조백관의 수장으로 공정·청렴한 정사를 펼쳐 민족의 사표가 된 황희 정승, 외길 구국일념으로 적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순국한 이순신 장군, 올바른 가정교육으로 자식(율곡 이이)을 당대 최고 지성으로 출사시킨 신사임당, 국가의 장래가 암담하던 일제 강점기 국민을 각성시켜 희망을 제시한 겨레의 선각자 안창호 선생.

김수환 추기경 묘소.

서울 명동대성당.


 ‘소외된 자들에게 봉사’ 교회 쇄신·현실 참여 권력자에 겸손·베풂 호소한 ‘우리시대의 양심’

2009년 2월 16일 가톨릭 김수환(壽煥·1922~2009) 추기경이 87세로 선종하자 한국인은 물론 로마교황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그를 애도하며 추모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 깊이 묻어뒀던 추기경과의 인연과 추억을 보듬으며 큰 슬픔에 잠겼다. 서울 명동대성당에 안치된 김 추기경의 성체를 친견하려는 조문 행렬은 4㎞가 넘었다.

 불과 4~5초간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지만, 묵언 속의 인파는 새치기 하나 없이 질서정연했다. 입춘을 지난 2월 한파가 유난히도 매서웠던 당시 취재 현장에서 만난 연로한 불교 신도 부부가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하시더라도 살아만 계시지…. 그분이 계신다는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고 버팀목이었는데….”

 1969년 3월 28일 대한민국은 환호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제12대 스테파노(세례명) 김수환 서울대교구장을 로마 교황청 추기경으로 서품한 것이다. 당시 교황은 가톨릭 최고기관인 추기경회의 정원을 135명으로 늘리면서 중남미 5명, 아시아 4명, 아프리카 2명을 새로 포함했다. 한국 가톨릭 사상 최초 추기경임은 물론 47세의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란 기록도 경신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탄생은 당시 한국의 인권상황과 사회변화에 적지 않은 동요를 예고했다. 그는 이미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사를 통해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 제시 ▲인간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교리 실천을 선언했다.

 김 추기경의 이런 사목 방침은 억눌려 있던 교회 안팎의 젊은 학생과 지식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그 후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을 못 하던 엄혹한 시절 그는 용기 있게 나서서 권력에 뼈아픈 충고를 서슴지 않았고 민주화 세력을 옹호했다. 국민들은 이토록 담대한 추기경을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했다.

 특유의 순진한 미소와 촌철살인의 유머 감각으로 좌중을 푸근히 감쌌던 김 추기경은 그와 함께한 일화들도 무수히 많다. 어느 해 관훈클럽 초청 연사로 나선 추기경에게 짓궂은 청중이 물었다. “추기경님께서는 아름다운 미인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참석자들은 감히 추기경한테 별걸 다 묻는다고 무안해하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추기경의 대답은 의외였고 폭소로 뒤집어졌다.

 “내가 미인을 보고 생각하는 걸 여러분이 아신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평소 독일 민요 ‘저 별은 나의 별’을 애창했는데 “우리 가요를 배우고 싶어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쉽게 배워지지 않는다”면서 웃곤 했다. 어느 해는 KBS 열린 음악회 명사 코너에 추기경이 초대됐다.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가 가요 한 곡을 간청하자 그는 이 노래를 불렀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너머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마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비록 박자는 서툴렀지만, 청중들은 모두 기립해 손뼉을 치며 추기경을 연호했다. 그는 권력자와 가진 자를 향해서는 겸손과 베풂을 호소하고, 신자와 국민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우리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는 생전에 약속한 각막 기증을 실천해 온 국민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직자 묘역에 예장됐다. 전체 묘역 중에서도 전후좌우의 산세가 형기적으로 꽉 짜여 누가 봐도 강한 기운이 응집된 명당 가운데의 명혈처다.

 김수환 추기경 서품 이후 한국 가톨릭 신자는 200여만 명이 증가했다. 그의 선종 이후 천주교 예비신자는 40%가 늘어났고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힌 신청자 또한 평소보다 10% 이상 많아졌다는 통계가 있다. 많은 신자가 “추기경님과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면서 “하늘나라에 간다면 추기경님 얼굴을 다시 한번 꼭 뵙고 싶다”고 간절한 소망을 말한다.

 먼 훗날 이 땅의 사람들은 스테파노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했던 우리 시대를 그리워할 것이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은퇴해 ‘혜화동 할아버지’로 돌아가기 수개월 전, 일간지 종교담당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서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우문(愚問)에 추기경은 이렇게 현답(賢答)했다.

 “봄날은 가고 여름은 보내며 가을은 떠나가고 겨울은 풀리는 것이지요.”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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