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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태조 왕건과 신숭겸 장군 묘

입력 2012. 12. 20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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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백성 가슴에 품는 큰 덕 긴 역사를 내다보는 혜안 후삼국 통일 발판이 되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 동상.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대신 전사했다.
국내 유일의 1인 3분(墳) 묘. 셋 중 하나에 신숭겸 장군의 황금 머리가 매장돼 있다.

 왕실의 잦은 변고와 혹독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천 년 사직이 위태롭게 된 신라 제49대 헌강왕 1년(875). 신풍 도선(道詵·827~898) 국사가 추락한 왕권과 부패 권력을 개탄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지세를 살피던 중 개성에 들렀을 때 일이다. 때마침 송악산 아래 정기 서린 길지가 보여 찾아가니 금성태수 왕융(王隆·?~897)이 집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태수, 그 집터를 우로 99자(약 30m)만 옮겨 임좌병향(동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앞산을 보게 하시오. 틀림없이 득국(得國)하는 큰 인물이 나올 걸세.”

 얼른 알아차린 태수는 짓던 것을 허물고 국사가 점지한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다. ‘무자식 상팔자’라며 체념하고 살던 왕융에게 2년 후 부인 한씨(추존 위숙왕후)가 아들을 낳으니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이다. 왕건이 17세 되던 해 도선이 다시 찾아와 신묘한 병법과 각종 술법을 전수해 주며 왕건에게 일렀다.

 “때는 바야흐로 난세이니 함부로 목숨 걸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니 무서운 지장(智將)이 되지 말고 만민을 품는 덕장(德將)이 되어 인심을 얻어라. 왕의 그릇된 판단과 국정 파탄이 초래한 백제·고구려 멸망사를 상기할 것이며 장구한 역사를 내다보는 인군이 되어라. 국가 기강이 흩어진 신라는 머지않아 곧 망하게 될 것이다.”

도선 가르침 안고 난국 예의 주시

 왕건은 도선의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얼음판 같은 난국을 예의 주시했다. 신라는 망조가 들어 한반도 동남쪽(경상도)의 변방 소국으로 전락했고, 견훤의 후백제는 서남쪽(전라도)을 장악해 중부지역(경기·강원·황해)을 차지한 후고구려(태봉) 궁예와 치열한 영토 싸움을 벌였다. 이 땅에 다시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국과 밀무역으로 거부가 돼 막강한 개성 호족(豪族)이 된 왕융은 궁예에게 거액을 바치며 아들 왕건을 맡겼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온갖 충성을 다했다. 궁예의 명으로 청주 괴산 남양 등 군·현을 쳐 평정하는가 하면 함대를 이끌고 나주를 공격해 함락했다. 이 공으로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크게 얻으며 태봉 3년(913) 시중 자리에 올랐다.

 궁예는 유능한 신하를 의심하는 무모한 군주였다. 왕권에 위협되도록 힘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은 무차별 처형했다. 어느 날 역모 혐의로 체포된 왕건에게 궁예가 물었다.

 “내 관심법(觀心法)으로 너를 보니 반역을 꾀한 게 확실하다.”

 “네, 그렇습니다. 소인이 감히 역모를 꾸몄으니 죽여주십시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는 자신의 관심법이 신통했음에 만족하고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오히려 상을 내렸다. 이런 군주에게 충성할 자 누구이겠는가. 태봉 5년(918) 6월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 장군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등극시켰다. 옛 고구려의 혼을 이어 국호를 고려라 이름 지은 새 나라가 개국한 것이다. 태조 왕건의 보령 42세였다.

신라와 선린우호·견훤엔 등거리 외교

 임금이 된 왕건 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신라 왕권이 붕괴하자 각 지역 호족들이 활개치며 민생을 짓밟았고 기세등등한 견훤은 고려와 신라를 무차별 공격했다. 태조에게는 민심 수습이 우선이었다. 신라 말기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 지나치게 가혹했던 조세정책을 크게 완화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딸을 후궁으로 맞아 혈연관계를 맺고 아들들에게는 높은 벼슬자리를 줘 우대했다. 태조의 후비(后妃)는 29명에 이르렀다.

 왕건은 신라와의 선린우호를 유지하며 견훤에게는 화전 양면의 등거리 외교술을 펼쳤다. 태조 10년(927) 마침내 대구 팔공산에서 왕건과 견훤 간에 사활을 건 대전투가 벌어졌다. 견훤 군에 포위된 왕건이 죽음 직전에 이르자 심복 신숭겸(?~927) 장군이 얼른 왕건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왕건을 피신시켰다. 견훤은 사로잡힌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단칼에 목을 내리쳐 몸뚱이만 고려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태조는 신숭겸의 목 없는 시신을 끌어안고 앙천통곡했다. “주군(主君)을 위해서라면 물 끓는 가마솥에라도 서슴없이 뛰어들겠다”던 젊은 날의 도원결의가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태조는 훼손된 신숭겸의 머리를 순금으로 만들어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 묘(강원도기념물 제26호)를 쓰도록 했다. 왕건은 신숭겸 묘가 도굴당할 것에 대비해 동일 묘역에 세 개의 봉분을 조성토록 배려했다.

왕건 현릉 잦은 이장과 수난 겪어

 술좌진향(동남향)의 신숭겸 묘는 국내 유일의 1인 3분(墳)의 특이한 묘제다. 동서남북의 사신사를 고루 갖췄고 혈처 뒤의 북현무 내룡맥이 직사로 내려와 무장 후손이 출현할 명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신립 장군이 그의 방손이다.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며 26년을 재위한 뒤 67세로 승하한 태조의 현릉(顯陵)은 신혜왕후 유(柳)씨와 함께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다. 우리 역사상 왕건의 현릉처럼 잦은 이장으로 수난을 당한 묘는 없다.

 ①제8대 현종 1년(1010) 제2차 거란의 침입으로 왕건 재궁(梓宮)을 향림사로 이치 ②1016년 현릉에 이장 ③거란의 3차 침입으로 1018년 재궁을 향림사에 또 안치 ④1019년 현릉에 다시 복장(葬) ⑤1059년 현릉에 도굴범이 들어 파묘 ⑥1217년 김산·김시 난으로 재궁을 봉은사로 옮김 ⑦1232년 몽고군 침입으로 강화도 이장 ⑧1270년 강화에 건물 짓고 임시로 매장 ⑨제25대 충렬왕 2년 재궁을 현릉에 다시 복장.

 땅속에 매장됐던 유해가 공기 중 산소를 만나면 거듭되는 산화작용으로 바스러져 버린다. 구천(九天)에 들지 못하고 아홉 번이나 바깥바람을 쐰 현릉 재궁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고려 백성들은 후손이 못나고 임금이 나라를 못 지켜내면 조상이 험한 꼴 당하는 법이라며 태조 왕건을 불쌍히 여겼다.

 국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고려는 뒤늦게 원나라 속국이 되고 말았다. 임금이 교체될 때마다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왕족 간 권력 싸움과 권신들 사이 분열로 제34대 475년으로 멸망할 때까지 국가적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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