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보병장비이야기

<88> 미 육군 응급처치 키트

입력 2012. 12. 10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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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때 큰 효과 발휘


살균 상태로 밀봉포장…2차 감염 최소화

칼라일 압박붕대와 금속제 용기를 채택한 초기 형태의 미 육군 응급처치키트.
필자제공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이전,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통해 많은 나라는 병사들의 생존성 보장을 위해서는 부상 직후 응급처치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료기술과 지식의 부족으로 부상이 곧 죽음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일상 다반사였다. 남북전쟁 당시만 해도 응급처치의 절대다수는 수족 절단이었으며 전체 부상자 약 57만 명 중 20만 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는 감염에 대한 지식 및 마취, 기타 다양한 의학 기술이 야전 응급의료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단 생존 상태로 후방 야전병원까지 후송되는 데 성공하면 사망에 이르는 확률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역시 이런 깨달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차 대전에서 미 육군은 부상 직후의 응급처치가 중요함을 깨달았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1920년대 병사 개개인에게 지급하기 위한 응급처치 키트를 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칼라일 병영에 있는 미 육군 의료기기연구소가 개발한 이 응급처치 키트는 개발한 곳의 이름을 따 ‘미국 정부용 칼라일 응급처치 포장’이라고 불렸으며 오래지 않아 ‘칼라일 붕대’라는 이름으로 병사들에게 더 친숙해졌다. 이 붕대가 2차 대전 중 미 육군의 주력 응급처치 키트였다.

 칼라일 붕대라고 불린 이유는 내용물이 거의 붕대뿐(나중에 소독용 분말 추가)이었기 때문이다. 흰색 거즈로 만든 패드에 거즈 끈이 달려 있어 상처 부위에 감아 지혈할 수 있는 압박붕대로, 상처를 덮고 지혈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 일반 보병들이 받는 훈련 내용과 시간으로 이 이상의 장비가 필요한 응급처치 요령을 교육받기는 어려웠으므로 매우 현실적이기도 했다. 그 이상의 처치는 어차피 위생병이나 군의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칼라일 붕대가 이전의 다른 붕대들과 다른 점은 살균된 상태로 밀봉포장돼 별도 살균 없이 상처를 깨끗하게 덮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병사가 이전에 더러운 붕대나 지혈대 때문에 감염돼 목숨을 잃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진보였다. 특히 2차 대전 중에는 칼라일 붕대와 함께 설파제 분말이 소독제로 포장됐다. 상처에 먼저 이 가루를 뿌려 소독한 뒤 붕대를 덮어 보호, 2차 감염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덕분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목숨을 건졌는지 통계가 나와 있지는 않으나 1차 대전 때보다 부상 직후의 감염으로 사망한 병사가 급감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편리한 장비도 하마터면 병사들의 손에 닿지 못할 뻔했다. 미 육군이 1940년에 대폭 증원될 때 예측한 수요량은 800만 개에 달했으나 실제 생산량은 1942년까지도 200만 개를 간신히 넘을 정도였다. 이유는 금속제 용기에 포장됐기 때문인데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943년 금속 호일로 붕대를 밀봉 포장한 뒤 방수 종이상자에 담는 새로운 방식이 개발됐다. 이 방식은 생산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 금속 용기보다 튼튼하다는 평가를 받자 당장 채택, 대량생산에 들어갔고 곧 거의 모든 야전 병력에 전달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겨울까지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를 위한 효율적인 1차 처치가 불가능할 뻔한, 아슬아슬한 변화였다.

<홍희범 월간 ‘플래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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