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우리고장명人명당

<65>안익태의 애국가와 국가

입력 2012. 11. 1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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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魂 쓸어안고 조국을 구하리라 기쁜 숨 몰아쉬며 이 땅을 노래했네


한강에서 바라본 공활(空豁)한 서울의 가을하늘. 한없이 높고 푸르다.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있는 안익태 부부 묘. 백호작국으로 소문난 명당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공식석상에서 불리기 시작한 이 노래는 국가로 준용(準用)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준용이란 국가에서 표준으로 지정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노래를 국가(國歌)라 부르지 않고 애국가(愛國歌)라고 호칭하며 애국가와 국가는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구구절절이 스며 있다.

애국가, 나라 잃은 설움 절절이…

 개화기인 1900년대 한반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청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며 한민족과 무관한 대리전쟁까지 일으켰다. 열강에 아첨하는 조정 관료들의 권력 다툼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 전국 곳곳의 우국지사들이 분연히 나섰다. 그들은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세우고 매국노들과 맞서며 민중의식 각성을 위해 교육에도 헌신했다.

 이들은 집회나 의식이 있을 때마다 나라 사랑 의지가 강하게 담긴 간절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고 충성하는 뜻이 담겼다 하여 애국가라고 했다. 당시 이렇게 불린 애국가 종류는 10곡이 넘었고 곡조는 주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une)에 맞춰 애창됐다. 석별의 정이 담긴 애수 서린 멜로디로 오늘날 전별회나 송년회 석상에 자주 등장하는 곡이다.

 그러나 이때 불린 여러 종류의 애국가는 가사와 곡조가 서로 달랐다. 광무 2년(1898) 고종황제 탄생일에 무관학교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영국 국가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의 가사 내용과 곡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고,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역시 영국 국가 형식을 그대로 베낀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갑오개혁(1894) 직후 지역마다 다른 애국가가 전파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수십 곡으로 늘어나게 됐다.

독립운동가 눈물로 부르며 의지 다져

 이처럼 중구난방으로 각기 불리던 애국가를 안타깝게 여긴 안익태(安益泰·1906~1965)가 한국인 정서에 맞게 새로 작곡해 대한민국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애국가다. 국가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노래다. 그가 이 곡을 만들 당시는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였고 국가로 지정할 국체가 없어 ‘대한국 애국가’라 이름 붙였다. 암흑과 탄압의 시기에 애국가란 곡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도 큰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이후 동가식서가숙하며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공식·비공식 행사 때마다 눈물 흘리며 이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 가사는 친일파 윤치호(1865~1945)의 작사설이 유력하나 확실한 고증이 없다. 노래 곡조 끝에 붙여 반복해 부르는 후렴(後斂) 대목이 독립문 기공식(1898년 11월 21일)에서 부른 애국가에 이미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 애국가는 윤치호 친필의 가사 원본과도 상당 부분 다르다. 현대에 와 애국가 가사는 종교적으로도 내분을 겪는다. 하느님(가톨릭)과 하나님(개신교)에 대한 표기방식인데 논쟁 끝에 ‘하느님’으로 확정됐으나 개신교 측에서는 변함없이 ‘하나님’으로 제창(齊唱)한다.

 왜정시대를 산 지식인, 관료나 지주(地主)로서 피해 가기 쉽지 않은 친일행적 시비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안익태에게도 숙명처럼 씌워진 멍에다. 평양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에 뛰어나 음악 신동으로 불린 그는 숭실중학 재학 중 무능 친일파 교사 추방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한 기개 있는 청년이었다. 일본, 미국의 명문 음악학교 유학을 거쳐 그가 유럽에 정착했을 때는 히틀러의 나치즘 공포가 전 유럽을 휩쓸 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연합군의 적국인 독일 이탈리아 등지를 돌며 작곡과 지휘활동을 했다. 중국 침략을 위해 일본이 세운 괴뢰국(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기념식에서는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직접 지휘했다. 2차 대전의 전세가 연합국 쪽으로 기울자 1944년 군국주의자 프랑코 총통이 지배 중이던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스페인 정부는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를 안착시키기 위해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앉히고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1946년에는 그곳 귀족가문 출신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마리아 돌로레스 딸라베라(1915~2009·약칭 로리타 안)와 결혼했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안익태는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한국환상곡을 비롯해 강천성악(降天聖樂), 애국선열추도곡, 한 송이 흰 백합화(첼로 곡) 등 조국에 바치는 헌가를 많이 남겼다.

수차례 고국 찾아 음악 발전 도와

 1955년 안익태가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벅찬 감회를 안고 고국을 방문했다. 그는 196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차례 한국을 찾아 KBS 교향악단 지휘, 3회에 걸친 서울국제음악제를 주도하며 조국의 음악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남편 사후에도 한국 국적을 유지했던 부인 로리타 안도 2005년 한국에 다시 와 그때까지 논란이 일어왔던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한국 정부는 안익태에게 문화포장(1957)에 이어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추서(1965)하고 1977년에는 대한민국 최고 명당으로 손꼽히는 서울 동작구 동작동 서울현충원(국가유공자 제2묘역 7호)에 그의 묘를 이장했다. 94세로 별세한 부인이 2009년 7월 남편 묘역에 합장돼 이 부부는 영원히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됐다.

 건좌손향(乾坐巽向)의 햇볕 잘 드는 동남향에 있는 안익태 묘는 이범석 장군과 김홍일 장군 묘역에 함께 있다. 서울현충원에서도 백호작국(白虎作局) 명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비록 반 평의 좁은 공간이지만 이 땅, 대한민국에 태어나 이곳 현충원에 묻히는 것보다 더한 영광이 있겠는가.

 미래 역사의 영광을 위해 과거 역사를 반추하고 공과를 엄정히 평가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잣대가 국론을 분열시키는 심각한 수준이면 모두의 불행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논쟁 수위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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