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우리고장명人명당

<64>한음 이덕형의 구국일념

입력 2012. 11. 0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33
0 댓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곧은 신념 필마단기<혼자 한 필의 말을 타고 감>로 왜장과 담판진 기백 난세 ‘청백리의 거울’로 길이남다


물길이 용맥을 가로질러 나가는 한음 대감이덕형 묘혈. 후손의 관직 발복이 더딘 자리다.
한음의 영정이 봉안된 쌍송재. 붉은 홍살문은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이다.                                    필자제공

 ‘오성과 한음’ 얘기는 언제 들어도 귀가 솔깃해진다. 어릴 적 서당친구로 장난기가 발동하면 서로 골탕먹인다는 밉지 않은 악동들의 일화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닌 구전 설화다. 오성 대감 이항복(1556~1618·경주 이씨·본지 2011년 12월 9일 자 보도)은 경기도 포천 태생인데 한음(漢陰) 대감 이덕형(李德馨·1561~1613·광주 이씨)은 서울 성명방(誠明坊·현 중구 필동과 남대문 사이)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오성이 한음보다 5살 연상이며 서울과 포천의 거리가 얼마인가.

 둘은 한음이 별시 문과에 급제하던 해(20세)인 선조 13년(1580) 처음 만나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나눈 사이다. 두 인걸은 영의정 자리를 번갈아 역임하며 서로 시기하지 않고 미증유의 국난 임진왜란을 극복해낸 조선의 4대 명재상이다. 특히 누란 위기의 어지러운 세상을 올곧은 신념으로 산 한음의 53년 생애는 공직에 임하는 후세인의 본보기다.

 사람이 시대를 잘 타고나는 것도 큰 복이라 했는데 한음은 난세를 살다 갔다. ▲문정왕후의 섭정독재와 권신들 간 당파싸움으로 민생이 붕괴하자 임꺽정 도적떼가 창궐하고 ▲국론분열의 틈새를 노린 왜적의 침입으로 삼천리 강산이 초토화된 데다 ▲간신 모리배를 두둔하며 동생을 쪄 죽이고 어머니를 폐모시킨 광해군의 패륜으로 민심이 떠났던 때다.

명나라로 가 명군 파병 성사

 일찍이 한음의 인물됨을 알아본 건 토정 이지함(1517~1578)이었다. 천기와 역술에 관통했던 토정이 조카이자 영의정인 아계 이산해(1539~1609)에게 사위 삼을 것을 권한 것이다. 아계는 주저 없이 지중추부사 이민성과 문화 유씨의 장남인 한음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담력 센 성격으로 재주가 뛰어나 어릴 적부터 문학에 통달했던 한음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충주까지 북상한 왜장 고니시가 한음과의 단독 담판을 요구해 왔다. 죽음을 두려워한 조정 신료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한음은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가 적장과 마주했다. 회담이 결렬된 뒤 오만방자한 고니시를 호통치고 길을 나서는 한음에게 오히려 왜군들이 경의를 표했다.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몽진 길에 나서자 내로라하던 권신들은 나라가 망할 줄 알고 가족들과 도망쳤다. 한음은 무능한 임금을 압록강 국경 가까운 정주까지 호송하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가 명군 파병을 성사시켰다. 그리고는 적통왕자 출생을 고대하며 미뤄뒀던 세자 자리에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앉혀 전란 중 민심을 다독였다. 당시로선 정치생명을 건 도박이었다.

왜군에 쫓기던 부인 투신 자살

 이때 한음에게 견딜 수 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강원도 안협으로 피란 간 28세의 부인(한산 이씨)이 왜군에게 쫓기자 그곳 백암산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한 것이다. 죽음으로 정절을 지켜낸 것이다. 한음은 대사헌, 병조·이조판서, 4도(경기 황해 평안 함경) 체찰부사를 번갈아 봉직했고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줄곧 전쟁터에 가 병사들을 독려했다.

 우·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된 한음은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를 설복시켜 기어이 서울을 사수토록 했다. 명군 제독 유정과 순천 전투현장에 종군해서는 왜장 고니시와 유정의 밀통 내용을 사전 입수, 이순신 장군에게 첩보를 넘겨 적군을 대파시켰다. 모진 세월이 흘러 참혹한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시련은 더 가혹했다. 조정은 공훈과 자리다툼, 모함과 무고로 쉼 없이 휘청거렸다.

 선조가 돌연 승하하고 광해군이 제15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한음은 다시 영의정이 됐다. 31세의 최연소 대제학에 이은 장인 사위 간 영의정이란 조선왕조의 진기록이다. 명나라 진주사가 되어 광해군의 국왕 책봉을 거부하는 명 조정을 설득해 윤허를 받아 귀국하니 조선 조정에선 더 큰 싸움이 벌어졌다. 간신 이이첨 무리가 획책한 살제폐모론으로 적통왕자 영창대군을 처형하고 생모 인목대비를 폐모시키자는 반인륜적 범죄였다.

정책 법도 어긋나자 목숨 건 반대

 한음은 자신의 주청으로 세자가 돼 왕위에 오른 임금의 정책이 법도에 어긋나자 목숨 걸고 반대했다. 간신들은 한음의 처형을 극력 상소했으나 광해군은 죽음만은 면해준 뒤 삭탈관직해 조정에서 쫓아냈다. 한음은 부친이 사는 양평 송촌리로 낙향해 울분을 삭이다 병을 얻어 광해군 5년(1613) 구국일념으로 헌신한 일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섭리를 운행한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돼 유배지서 분사하고 이이첨 일당은 능지처참으로 비명횡사했다. 인조 8년(1630) 한음의 관작이 회복되고 문익공(文翼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제21대 영조 임금이 한음의 제사를 영원히 모시게 하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내리며 도열한 대신들에게 내린 준엄한 옥음이 생생하다.

 “경들은 기억하라. 역사의 진정한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한음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82-1번지에 묘좌유향(정서향)으로 있다. 한음이 부모와 부인의 묘를 이장(1603)한 뒤 손수 점지했다는 자리로 유명한데 신풍이었던 그의 명성답게 후손들이 발복하는 자리일까. 현장을 찾은 풍수 학인들의 국세판정은 서로 엇갈린다.

 우람한 내·외청룡의 호위로 장자 세습이 보장되는 혈장이긴 하나 전방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길이 직사로 빠져나간다. 좌우 능선들도 중앙의 물길을 따라 비주(飛走)하고 있어 용맥을 감싸거나 보호해 주지 못하고 있다. 명당 기운이 쇠한 연유인가 아니면 붕당정치 폐해와 험난한 벼슬길을 피하려 한 한음 대감의 속 깊은 배려였을까.

실제로 조선시대 광주 이씨 영화는 한음의 영의정 벼슬로 마감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설에는 경기도 광주의 이인손(충희공) 묫자리를 영릉(세종대왕) 자리로 내주며 이장한 뒤 문중 운세가 꺾이고 조선왕조는 100년 연장됐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설이 무성하다.

 문중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 명문가 중 순수 장자 세습으로 이어지는 몇 안 되는 가문이긴 하나,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다가 영조의 탕평책 이후 수 명의 당상관(정3품)만 배출했다는 증언이다. 평민당 부총재를 지낸 이중재 씨가 광주(廣州) 이씨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