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역부족, NATO·EU와 손잡다
디키르히에 있는 룩셈부르크 개인 운영 군사박물관 정문. |
6·25전쟁 참전 군인 사진을 진열하고 개인 공적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출처: 룩셈부르크 군사박물관 |
▶단 2시간 만에 독일에 항복한 룩셈부르크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아르덴느 숲 속을 통과하며 북쪽으로 계속 달린다. 급하지 않은 완행열차라 시골 마을마다 기차가 서는 것 같았다. 약 2시간 후에 도착한 디키르히(Diekirch) 역도 너무나 작은 시골 역이다. 한적한 마을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도 마을 골목길에서 룩셈부르크 장교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룩셈부르크군의 총병력은 약 700명이며 그중 장교는 60여 명이란다. 전원 지원제이며 비록 작은 군대지만 세계 분쟁지역에는 빠짐없이 PKO 요원을 파병한다고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임에도 독일 침공 때 단 2시간 만에 항복했단다. 많은 청년이 조국을 탈출해 연합군에 가담해 싸웠으며 그들의 사연은 군사박물관에 가면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했다.
▶힘없는 명분상의 중립은 냉혹한 국제사회서 웃음거리
독일 점령하에서 많은 룩셈부르크 인들이 독일군에 강제 징집됐으며 국내의 유대인들은 체포돼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 룩셈부르크도 예외 없이 민족을 배반하고 나치에 적극 협력한 부역자들의 처벌로 사회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 후 ‘피에르 베르너’라는 걸출한 룩셈부르크 정치가의 출현으로 단일 화폐사용을 통한 ‘유럽연합(EU : European Union)’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유능한 정치가 덕분에 작은 나라 룩셈부르크도 당당하게 EU 국가 대표국 역할을 맡기도 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간에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3개국 모두 영국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약소국의 비애를 톡톡히 맛보기도 했지만, 국가 경제발전 장기비전을 서로 협력해 구상하게 된다. 결국 3개국은 상호관세를 철폐하고 동률의 수입 관세를 부과하기로 합의하면서 베네룩스(Benelux) 3국을 출범시켰다. 아무런 힘도 갖추지 못한 명목상의 중립은 적국의 침공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이들은 2차 대전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다. 결국 베네룩스 3국은 중립정책을 폐기하고 나토(NATO :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해 자신들의 생존을 우방과의 동맹에 의존하게 된다.
▶개인 열정과 자원 봉사자들이 만든 룩셈부르크 민간 군사박물관
룩셈부르크의 민간 군사박물관장 롤랜드(Roland.J.Gaul) 씨는 한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렬한 친한파였다. 그는 이미 한국을 네 번이나 방문했고 6·25전쟁 60주년 행사와 관련해 참전용사들과 함께 또다시 방한 초청을 받았다. 이곳 박물관은 개인 사재로 설립했으며 각종 장비와 전시물은 외국 단체나 정부로부터 기증받았다. 직원들도 전원 자원봉사자들이며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도움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작은 규모의 전시 공간이지만 6·25전쟁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80여 명의 사진과 개인 공적사항,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훈장·부대수치·표창장 등이 빠짐없이 잘 정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혹독한 피점령국 국민의 설움을 맛본 룩셈부르크 국민은 미·영 연합군 덕분에 자유를 되찾게 됐다. 그 후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을 때 미국·영국을 포함한 많은 자유진영 국가들이 참전하게 된다. 과거 룩셈부르크가 연합군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다는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이곳 청년들 사이에 전쟁 참여 열기가 솟구쳤다. 특히 1개 소대 규모의 소수 전투병력 파병이 결정됐을 때 많은 청년이 6·25전쟁 참전을 지원했다. 결국, 약 10대1의 치열한 경쟁을 물리친 일부 청년들만이 한국에 갈 수 있었다고 박물관장 롤랜드 씨는 증언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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