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완결]세계의전사적지답사기

<26>영국-독일 아른헴 대교 전투

입력 2012. 07. 0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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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 가져가도 영국 공정대대원 불굴의 감투정신 다리만은 못준다”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서 나흘 넘도록 끝까지 항전

아른헴 근교에서 발견된 영국군 공정부대원 유해 안장식.     출처: 2011년 9월, 아른헴 전투기념 홍보 책자

독일군 포위 속에서 숨져가는 영국군 부상병을 위해 기도하는 군목.  출처:아른헴 영국군 공정부대 기념관


 ▶‘머나먼 다리’ 영화로 유명한 아른헴 대교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전쟁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영국 제1공정사단 제1낙하산여단 제2대대와 3대대 일부 병력 750여 명이 아른헴 대교 확보를 위해 독일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약 4일간에 걸쳐 끝까지 항전하다 전원이 전멸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의 상업성을 고려한다면 다소 과장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 기념관 자료, 주민 증언 등을 종합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불굴의 감투 정신으로 공정부대원들이 전투에 임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포위된 영국 공정대대원 ‘전멸’은 가능! 그러나 ‘항복’은 없다

 1944년 9월 17일(D일), 낙하산으로 강하 후 2대대장 프로스트(Frost) 중령은 시가지의 일부 독일군을 소탕하고 간신히 아른헴 대교에 도착. 교량 북단을 장악한 시간은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저녁. 높은 건물 꼭대기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교량 옆 약 20개소의 민가에 부대원들을 배치했다.

 9월 18일(D+1일) 오전 9시, 지붕 위의 경계병이 소리쳤다. “아군 전차들이 오고 있다!” 부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지붕 위로 올라갔으나 가까이 접근해 온 전차·장갑차는 독일군. 유일의 대전차 화기인 ‘피아트’ 로켓포로 간신히 적 기갑부대를 막아냄. 오후 2시 영국군 증원부대가 또다시 낙하. 제2대대와 합류하려 했지만, 시가지 전투에서 증원부대는 분산되고 말았다.

 9월 19일(D+2일), 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운 2대대 장병들! 탄약·식량이 거의 떨어짐. 영국군의 아른헴 도착을 알게 된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전투를 지원하려고 노력. 독일 기갑부대를 막기 위해 부녀자·어린이들까지 나와 도로 위에 흥건히 고인 피에 미끄러지며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쌓다. 오후 독일군 1명이 백기를 갖고 진지로 옴. “당신들은 완전히 고립됐소. 항복하시오!”, 프로스트 중령 왈 “방금 그 말, 내가 자네 지휘관에게 해주고 싶다고 전하게.” 뒤이어 독일군 전차포가 20여 채의 민가를 향해 집중 포격. 전차포에 맞은 건물 속에서는 흡사 개미집을 들쑤셔 놓은 듯 숨어 있던 영국군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다리 건너편 독일군 진지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9월 20일(D+3일), “여기는 2대대, 사령부 응답하라!” 대대 통신병은 목이 터져라 사단본부 호출. 그러나 바로 이 시간, 사단은 아른헴 대교를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음. 간신히 연결된 사단과 2대대의 무전 내용. “증원 병력을 언제 보내 줄 것인지?”를 묻는 대대장 말에 사단장은 “우리가 그리로 갈 수 없으니, 자네들이 이 곳으로 올 수 없느냐?”라며 눈물을 흘림. 부상병들을 넘겨주면 치료해 주겠다는 독일군의 신사 제의로 격전 속에서 짧은 휴전이 성사됨. 다시 한번 항복 권유를 무시한 영국군에 대해 무자비한 전차포 집중 사격이 이뤄짐. 21일 아침까지 간간이 저항하던 잔존 영국군은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려 전원 전사하게 된다.

 아른헴 지역에 투입됐던 영국 제1공정사단 장병 1만5명 중 생존자는 단지 2163명에 불과했다.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아른헴 대교를 사수하고자 했던 프로스트 공정대대를 추모하기 위해 이 다리를 오늘날에는 프로스트 대교(Frost Bridge)라고 부른다.

 ▶살인적인 네덜란드 물가, 그래도 밀려드는 관광객

 시골 도시 아른헴은 라인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전쟁기념관, 유스 호스텔을 찾아가며 네덜란드의 높은 물가를 실감하게 된다. 시내버스를 한 번 탈 때마다 4000원 내외의 버스요금을 냈다. 다른 나라에서는 1시간 내에는 기존 버스 승차권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숙소 요금도 프랑스, 벨기에보다 2배 이상 비싸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이런 시골 마을에도 단체 자전거 여행객, 참전용사 후손들을 포함해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신종태 합동군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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