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승만대통령연설

이승만 대통령 자유와 정의를 말하다<34> 하와이 방문, 그리고 귀국 - 최종회

입력 2011. 12. 30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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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미국 없이는 자유 세계의 희망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1954년 8월 8일 오후 6시 30분(호놀룰루 시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는 이 대통령이 1915년부터 1938년까지 2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제침략으로부터 도피해 온 한국인 피난민들을 위해 학교·교회·애국단체를 만들어 한국 국민에게 자유의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한 곳이다.
1954년 8월 10일, 하와이 주지사에게 이상범의 ‘아침’이라는 한국화를 선물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호놀룰루의 200여 한인 동포와 태평양 함대사령관 펠릭스 스텀프 제독 등 저명한 인사들이 열렬히 환영해 줬다. 일행은 진주만에 있는 마칼라파 영빈관에 투숙했으며, 미 태평양 함대사령부의 스텀프 제독이 이 대통령 내외를 극진히 대접했다.

 8월 9일 월요일 아침, 사무엘 킹(Samuel King) 하와이 주지사가 마칼라파 영빈관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어 이 대통령 일행은 태평양 함대사령부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고, 미군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저녁에는 스텀프 제독이 베푼 리셉션에 참석했다.

 ■ 하와이 옛 친구들과의 만남, 펀치볼 국립묘지 참배

 8월 10일 아침, 이 대통령 일행은 이올라니 궁전으로 가서 사무엘 킹 주지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킹 주지사에게 이상범 화백의 ‘아침’이라는 한국화를 선물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하와이 신문사 두 곳을 방문했다. 우선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신문사에서 로린 써스톤 발행인과 레이먼드 콜리 편집인을 만나 환담하고, 호놀룰루에서 1913년에 코리안 퍼블릭 위클리를 창간했던 것을 회상했다. 다음에는 호놀룰루 스타 불레틴 신문사를 방문해 릴리 알렌 편집인을 만났다.

 예정에 없던 신문사 두 곳을 방문한 후 이 대통령은 미 헌병과 호놀룰루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호놀룰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분화구에 위치한 국립 태평양 군인묘지로 달렸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사망한 많은 미국인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이 대통령 일행이 탄 차량이 묘지에 들어서자, 군 의장대가 `받들어총'을 해 영접해 줬다. 차량에서 내릴 때부터 클라크 라프너 소장이 이 대통령을 안내했다. 그는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이며,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10군단 참모장이었고, 그 후 한국에서 미 2사단을 지휘했었다.

 오후에 이 대통령은 1919년, 자신이 창건한 한인기독교회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한국어로 미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서 누나누 묘지에 묻힌 친구들의 묘소, 한국동지회 사무실, 칼리 계곡의 양로시설 등을 방문했다.

 늦은 오후에 하와이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이 대통령 내외를 위한 리셉션이 개최됐고, 저녁에는 킹 주지사 주최 만찬회가 열렸다.

 ■ 귀국길에

 8월 11일 수요일, 호놀룰루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점심을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은 고별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국빈방문을 마무리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미국 땅을 떠나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내가 제2의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됐던 것은 멋진 체험이었으며, 나와 아내에게 베풀어준 정중한 환대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나는 미국의 모든 친구들이 미국과 앞으로 올 세대의 안전과 복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생각해 보기를 희망합니다.

 공산주의자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철의 장막 뒤에서 구조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미국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칙의 챔피언이자 옹호자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평화는 절대로 평화가 아닙니다. 항구적인 평화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한 확고한 토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들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평화의 원칙들도 포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영속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확립시킨 분들에게 보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모든 자유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명과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무자비하며, 문명사회의 국가나 국민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품격을 갖추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적의 유일한 목표는 모든 자유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산과 주민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에 한국을 구하기 위해 오늘이나 내일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 하나라면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아주 겸허하게 미국에 촉구합니다. 도움을 갈구하는 6억 중국인들과 아시아 및 그 이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가장 절실한 호소이며, 나의 진심 어린 기도입니다. 이는 한국, 중국 그리고 노예화 위협을 받고 있는 국민들과 국가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유 미국, 투쟁하는 미국이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미국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시에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나머지 우리 모두를 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1일 오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기에 탑승해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는 웨이크 섬과 유황도를 경유해 8월 13일 오전 11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이 대통령은 귀국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제네바 회의 실패 이후 우리 국군과 국민은 6·25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미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경제원조나 기타 물질적인 원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유엔군이 우리 국군과 똑같은 조치를 취하든지, 혹은 우리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최고위층이 호의적이지 않아서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조문제와 방위문제에 관해서는 책임 있는 미국 관리, 상하원의원, 미국 국민이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적의 도발로 시작된 6·25전쟁을 휴전이 아니라 기필코 자유와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는 회한의 외침이었다. 미국 국빈방문을 통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가 꽃피는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시도는 이렇게 좌절되고 말았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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