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73>`미그 앨리'의 격전

입력 2011. 11. 2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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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압록강 사이 좁은 지역서 31개월간 공중전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첫 공세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항공전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11월 1일 오후 1시 35분. 평안북도 압록강 부근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미 공군의 F-51 무스탕 전투기 4대와 T-6 모스키토 전선통제기 1대는 생전 처음 보는 적 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점처럼 작던 적기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군 조종사들은 경악했다. 적기는 북한 공군의 Yak-9기 같은 프로펠러가 달린 구식 레시프로 전투기가 아니었다. 제트기가 분명했고, 그것도 무척이나 빨랐다. 귀환한 조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기지에서 즉시 적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디브리핑이 열렸다. 미군 조종사들이 목격했다는 제트 전투기의 정체는 분명했다. 다름아닌 구소련이 1947년 말 개발을 끝낸 신예 MiG-15였다.

미국 공군 F-86 전투기가 6·25전쟁 중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자료사진

 ◆ 첫 제트기 공중전

 MiG-15 전투기는 그 이후로 가끔 모습을 보였지만 제트 전투기끼리 처음으로 공중전을 벌인 것은 11월 8일이 처음이었다. B-29 폭격기의 신의주 폭격을 앞두고 적 대공포를 제압하기 위해 공격 중이던 미 공군 F-51 무스탕 전투기와 F-80 전투기 앞으로 적 MiG-15가 튀어나왔다.

러셀 브라운 중위는 자기가 몰던 F-80 앞에서 급강하하는 적 MiG-15의 꼬리를 물어, 기관포를 사격했다. 적기는 이내 선회하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역사적인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이었다.

 이틀 뒤인 11월 10일에는 미 해군 항모 밸리포지에서 이륙한 F9F 팬더 제트 전투기도 MiG-15를 격추시켰다. 겉으로 드러난 전과만으로 보자면 여전히 미군기의 우세가 유지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미 공군 관계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적 MiG-15가 미군 B-29 폭격기를 잇달아 격추하는 등 적은 미국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미 공군 당국자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디브리핑 결과 미군기들이 MiG-15기를 격추시킨 것은 조종사들의 능력 덕택이었지 기체 성능이 우수해서가 아니란 점이 분명해 보였다. 적 MiG-15는 당시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주력 전투기였던 F-80보다 속도가 더 빨랐고 전반적으로 성능이 우세했다. 유일한 대안은 F-86 제트 전투기뿐이었다.

 ◆ F-86 긴급 배치

 F-86 제트 전투기는 이제 막 미 본토에 배치를 시작한 단계였다. 배에 태워 한국으로 가져오려면 15~16일 걸릴 터였다. 전투기를 탑재하고 다시 내리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20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원래 해군 호위 항공모함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퇴역한 케이프 에스페란스(USS CVE-88 Cape Esperance)를 일종의 항공기 해상 수송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결국 케이프 에스페란스가 F-86을 싣고 일본에 도착한 시점은 1950년 12월 10일이었다.

F-86이 실제로 한반도 상공으로 출격해 MiG-15를 처음으로 격추한 것은 12월 17일에 가서였다.

 그제서야 극동공군 관계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지만 우려되는 부분은 여전히 남았다. 미 공군 F-86 투입 이후 MiG-15와의 공중전에서 우세를 차지했지만, 양측 전투기의 성능이 비슷하다는 것이 미군 내부의 평가였다. 조종사들의 경험과 조종 능력 때문에 미국이 유리했을 뿐 일부 성능은 MiG-15가 오히려 우위였다. 특히 상승률은 대체로 MiG-15가 우세했다. MiG-15가 도주하다 상승각 60도로 선회하면서 상승하면, F-86은 추격하다 실속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 정도였다. 더욱 문제는 지상전 전황이 절망적인 상태였다는 점이다. F-86이 첫 격추 기록을 거두기 이틀 전인 12월 15일 미 8군 예하의 미 육군과 국군 사단들은 북한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고 38선 이남까지 이미 후퇴한 상태였다.

 ◆ 성역에서의 싸움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평안북도 청천강 이북에서부터 압록강 이남 사이의 좁은 지역에서 미 공군의 F-86과 공산 측의 MiG-15 사이에 격렬한 공중전이 계속 이어졌다.

처음 전장에 출현한 공산 측의 MiG-15기는 소련 조종사들이 중공군 복장으로 조종하고 있었고, 기체에는 북한 공군 마크를 그렸다. 소련군 공식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후 1951년부터 중공군 소속 MiG-15도 한반도 상공에 출격했고, 1952년부터는 북한 공군 소속 MiG-15도 간간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산 측 공군의 주력은 사실상 정체를 숨기고 있던 소련 64항공군단이었다.

 공산군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밀리에 투입한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노출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본적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좁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미군 공군 기지가 위치한 일본이나 한반도 38선 남쪽을 공격할 의지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미국도 압록강 북쪽 중국 영토 내의 기지는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군들은 중국 영토 내인 만주에 자리잡은 안전한 성역에 기지를 두고, 미군기들이 압록강 부근으로 출동할 때만 이륙해 요격을 시도했다.

결국 미국의 폭격기와 전폭기들은 북한 전역에 폭격을 감행했으나, 양측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은 오로지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좁은 지역에서만 주로 벌어졌다. 미국은 이 기묘한 공중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미그기의 회랑(MiG Alley)’이라고 불렀다.

 ◆ 엇갈리는 전과

 미그기의 회랑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뒤엉켜 수시로 격렬한 공중전을 벌였다. 전투는 대부분 공산 측의 MiG-15 전투기가 속도가 느린 미국의 B-29 같은 폭격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촉발됐다.

 적 MiG-15는 폭격기만을 노릴 때도 있었고, 주변의 F-86 같은 호위용 전투기를 먼저 공격할 때도 있었다. 공중전의 규모는 비교적 커서 1951년 5월 20일에는 F-86 36대와 MiG-15 50대가 미그앨리에서 격전을 벌일 정도였다.

 1951년 6월 22일부터 공산 측은 폭격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미 F-86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노리고 출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미 공군은 1951년 말에는 무려 100대가 넘는 MiG-15 대편대가 미그기 회랑에 동시에 출현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미국의 공식 전사에 따르면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F-86은 MiG-15 792대 혹은 793대를 격추했다. 이에 비해 미국이 제공작전 중 손실한 전투기의 수는 직접적인 공중전에서 격추당한 58대를 포함해 총 79대였다. 공식 전과는 1대10의 비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소련군 출신 참전자들이 미 공군의 전과는 과장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참전용사들의 개별 증언으로 공개된 구소련 측 주장을 요약하면 소련 공군의 손실은 335대이고, 전과는 전투기를 이용한 격추만으로 1097대라고 돼 있다.

 중공군 측 공식 전사에 나오는 주장으로는 미군기 330대 격추, 9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돼 있다. 자신들의 피해는 피격 항공기 231대, 손상 입은 항공기 151대라고 설명하면서 어디까지가 격추된 사례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구소련과 중국의 전과 주장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합산한 수치이고, 미국 측이 밝힌 내용은 전투기 손실이어서 직접적인 비교는 쉽지 않다. 다만 미국이 실종 조종사 탐색 차원에서 2000년대 중엽 이후 공식 공개한 6·25전쟁 당시 미 공군 손실 전투기 목록을 보면 F-86 기종만 215대에 달한다. 전투·비전투 손실을 어떻게 구분할지, 모순되는 자료를 어떻게 평가하고 연구할지에 따라 앞으로 전과에 큰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이 러시아 국방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보면 소련 64항공군단도 예하 사단들의 전과 보고를 의심했다. 심지어 “과장 보고는 범죄적 태만”이라고 표현한 사례도 발견된다. 소련군 전과도 과장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중공군의 전과도 예전부터 과장으로 유명하다. 6·25전쟁 공중전의 세부 전과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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