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72>1950년의 항공전

김병륜

입력 2011. 11. 2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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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전투기 등 1172대 투입 제공권 장악


개전 초반 북한의 항공기 보유 대수는 미군 추정으로는 150대, 구소련 자료에 따르면 239대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아시아지역 일대에 배치된 미 극동공군(FEAF : Far East Air Force) 예하 3개 항공군들이 보유한 전투기와 폭격기, 수송기는 모두 1172대나 됐다. 일본 본토의 5공군을 중심으로 오키나와와 괌의 20공군, 필리핀에 주둔하는 13공군 등 총 3개 항공군으로 구성된 극동공군의 전력은 북한 공군보다 최소 5배 이상의 전력이었다. 질적 격차는 더욱 컸다. 북한 공군의 주력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나 어울렸던 Yak-7/9/11 전투기와 IL-10 슈톨모빅 공격기 위주였다. 이에 비해 미 극동공군은 이미 제트 전투기인 F-80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구식 F-51 무스탕 전투기와 F-82 트윈무스탕이 가세했고, B-26 폭격기는 물론이고 B-29 폭격기까지 보유했다. 여기에 개전 후 보름도 되지 않아 미 본토에서 미 공군 소속 중폭격기 전대가 한반도 인근 지역으로 추가 배치됐다.

미 공군 B-29 폭격기가 6ㆍ25전쟁 중 북한의 군사 표적 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미 공군 자료사진

 ◆아군의 제공권 장악

 이 같은 극적인 전력 격차를 생각하면 6ㆍ25 항공전의 결과는 새삼 궁금할 것도 없었다. 미 극동공군은 개전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부터 미국인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 상공에 출동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날인 27일 F-82 전투기가 북한 Yak-9기를 격추해 미 공군의 6ㆍ25전쟁 첫 번째 공중전을 기록했다.

 28일에는 극동공군 예하 5공군 소속 B-26 폭격기가 문산 부근을 공격해, 폭격기의 첫 출동 사례가 됐다. 29일에는 B-26 폭격기가 평양을 공습해 개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 지역에 대한 공습이 이뤄졌다.

B-29 전략폭격기도 6월 28일 처음 한국에 출격한 데 이어 7월 6일 북한 원산정유공장을 폭격하면서 전략폭격기에 걸맞은 위용을 과시했다. 전투기 한 대 없던 한국 공군도 F-51 전투기를 새롭게 인수해 7월 3일부터 북 지상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개전 당일 홍콩에 기항 중이던 미 해군은 7함대의 에섹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USS CVA-45 Valley Forge)는 필리핀에서 보급을 받은 후 즉시 한국으로 출동해 7월 3일에는 평양의 북한 공군기지를 공습했다.

미 항모 밸리 포지함에 탑재한 A-1 스카이라이더 공격기, F-4U 콜세어 전투기, F-9F 팬더 전투기 등은 미 공군에 비해서는 다소 구식 전투기였으나 북한 공군 전력과 비교해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아군에 더욱 희소식은 박서·에섹스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미국 항모들까지 줄줄이 한반도 주변 해역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이었다. 미 공군만으로도 압도적인 전력 격차가 있는 상황에서 미 해군 항모들까지 가세한 이상 전력 격차는 절대적이었다.

 ◆ 미국 항공전력의 활약

 이 같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미 공군, 미 해군, 한국 공군은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1950년 8월까지 지상에서는 국군과 미군이 점차 후방으로 밀리면서 어렵게 지연전을 펼쳤지만, 한반도 상공은 남쪽부터 북쪽까지 우군 항공기가 뒤덮으면서 확고하게 제공권을 장악했다.

 1950년 6월부터 11월까지 미 공군이 공중전에 출격한 횟수는 단 1760소티(출격)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아군 지상군 주변의 적을 직접 공격하는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에는 2만3260소티를 기록했다.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군수공장 등을 파괴하는 후방차단(Rear Interdiction)도 1만8350소티에 달했다.

 같은 기간 중 미 극동공군이 공식 집계한 전과는 북한 항공기 격추 104대, 차량 파괴 8367대, 철도 차단 379개 지점, 교량 파괴 118개, 사살 병력 3만9000명이었다. 물론 첨단 관측 수단이 제한되는 당시의 항공 전과는 전과 확인에 미묘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군이 1950년 개전 초반 최대의 위기 국면에서 방어에 끝내 성공하고 반격과 북진으로 국면을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항공전력의 활약상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압도적인 우군의 항공전력은 1950년 8월과 9월 낙동강전투에서 결사적인 방어전을 펼치던 국군과 미 육군에 든든한 친구이자 구세주였고,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 김일성의 넋두리

 북한군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어했던 적도 다름 아닌 미 공군과 해군의 항공전력이었다. 지상군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병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중국과 대륙으로 연결돼 있고 해외교역도 없던 북한으로서는 바다는 포기해 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하늘이란 공간을 지키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인천상륙전 직후인 1950년 9월 29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항공전력 지원을 요청했다. 러시아 대통령 문서보관소 문서군 45에 포함돼 있다 냉전 종식 후에 공개된 이 김일성의 서신은 당시 북한이 미국의 항공 전력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다. 동시에 김일성이 미 항공 전력의 활약상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솔직한 고백이자 6ㆍ25전쟁 당시 미 공군과 해군 항공 전력의 업적을 적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1000대가 되는 여러 종류 항공기들이 우리(북한)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제공권을 장악하여 전선과 후방에서 매일 밤낮없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적의 비행부대는 철도와 도로, 전신과 전화 통신망, 교통수단과 기타 목표물을 자유롭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군은 작전활동은 물론 부대의 자유로운 기동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중략) 아군부대에 필요한 제반 물자를 공급하고 전선에 대한 부단한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어느 정도 제공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 북한 공군의 돌발 작전-가끔 결정적 순간에 일시·국지적 공격

 압도적인 전력 격차 때문에 1950년 7월이 가기 전에 북한 공군력은 사실상 괴멸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북한 공군은 가끔씩 돌발적인 작전을 벌여 아군을 놀라게 했다. 7월 10일 북한 공군의 Yak-9 전투기 4대가 청주 부근을 통과하던 미 육군 24사단 19연대를 공습했다. 12일에는 오키나와에서 출동한 B-29 폭격기 1대가 조치원 근방에서 북한 공군 Yak-9 전투기 3대의 공격을 받고 격추됐다. 북한 공군을 가볍게 생각하던 미 공군에 B-29 폭격기의 격추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1950년 7월 16일 지상군의 금강 도하 때도 북한 공군이 갑자기 Yak-9 전투기를 출격시켜 미 육군의 포병 관측기를 몰아내 미 포병의 포병사격을 일시적으로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북한 지상군의 도하를 성공시켰다. 결정적인 순간에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제공권 장악으로 지상군 작전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작전이었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전 때도 북한 공군기 2대가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국의 상륙기동부대를 상대로 무모한 출격을 감행했다 순식간에 1대는 격추되고 1대는 도주한 사례가 있다.

북한 공군은 1951년 이후에도 완전 구식 Po-1 복엽기를 투입해 장거리 저공 침투비행으로 우리 측 후방을 폭격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951년 6월 16일 수원비행장 공격이 대표적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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